한국 동란에 관한 사진들 #4
이 사진들은 알바니아 태생으로 1 ·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 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저명한 사진작가인 故 가디미트리 보리아(1902 ~ 1990)가 駐日 美 극동 사령부 사진반에서 일할 때 한반도 각지를 돌며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은 체면, 양심, 도덕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빈 깡통을 들고 거리에서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만 했었다.
나무 뿌리라도 먹어야만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잡초보다 더 모질 게 살아 남아야만 했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 뿌리는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한 끼 식사를 위한 땔감이었을까?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 혁명과 쿠데타 군사 독재와 경제 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한국인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 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한 단면이다.
개털 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 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좋았었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비록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들이 바글대고 있다.
풀썩 주저 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하다.
땔감도 넉넉치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 있는 듯하다.
연을 든 채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傷痕(상흔)을 잠시 잊은 듯 하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배대를 고개를 외로 꺽고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이 손에 쥔 깡통속을 바라보는 노인.
이렇게 전쟁은 노인의 빈 담배대와 소년의 빈 깡통속에 있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소녀가 탈진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요즘 북한 장마당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쳐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지고 수백리 길을 걸어 피난을 떠나야만 했었다.
길가에 앉아 참외 등을 팔고 있는 아낙들
File... 編輯... 장하다 多張印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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