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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2)

張河多 2011. 11. 12. 04:17

청춘은 맨발이다 - 인생은 맨발 마라톤…도전하라

⑪ 스타 탄생 (하)

평범한 젊은이였던 ‘강신영’을 하루아침에 스타 ‘신성일’로 만든 신상옥 감독. 신 감독은 1960년대 한국 영화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김한용 사진집 『꿈의 공장』(눈빛·2011)에서]

열망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1959년 8월, 신필름 신인 배우 오디션 현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광화문 뒷골목 일대가 북새통을 이뤘다.
오죽했으면 기마경찰이 출동해 현장을 정리할 정도였을까.

나는 그날 공군 조종사인 형의 옷장에서 몰래 훔친 빨간색 반팔 몽탁 티셔츠를 걸쳤다.
당시 몽탁은 사치품으로 통했다.
나일론을 뛰어넘는 최고의 옷감이었다.
원서도 넣지 않았지만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밀려든 지원자·구경꾼 때문에 인근 KBS 국제방송 건물 처마까지 떠밀려 갔다.
그 밑에서 비를 그으면서 오디션 풍경을 그냥 넋 넣고 구경했다.

그때 한 구두닦이 소년이 다가와서 건너편 취미다방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알려주었다.
세상에, 서울 하늘 밑에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니….
헤엄치듯 인파를 가르며 예총회관 건너편 취미다방으로 갔다.
너무 궁금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방 맨 구석에서 얼굴이 까맣고 깡마른 사람이 나를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상옥 감독을 도와 일하는 이형표 기술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신 감독과 말을 놓는 사이였다.
그는 대뜸 “원서는 냈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지원하러 들어가고 싶니?” 하고 다시 물었다.
얼떨결에 그렇다고 했다.

“너 신상옥 감독 얼굴은 아냐? 몰라? 그럼 여배우 최은희씨 얼굴은 알아? 그래, 최은희 옆에 머리 길고 덥수룩한 사람이 신상옥 감독이야.”

여배우 최은희는 영화 ‘마음의 고향’을 통해 알고 있던 터였다.
이 감독은 흰 종이에 자기 사인을 한 후 이걸 보여주면 신 감독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 사인을 보여주니 오디션장 스태프들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어떤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는 최은희를 알아 보았고, 그 옆에 신 감독이 앉아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신 감독은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오후 5시에 다시 와!”, 이 한마디만 던졌다.
기분이 묘했다.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라는 긴장 속에서도 뭔가 흥분이 됐다.

그때가 오후 2시 무렵.
세 시간 말미가 있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냥 어슬렁어슬렁 남산공원을 배회했다.
당시만 해도 시계를 찬 사람이 100명에 2~3명이 될까 말까 했다.
남대문을 거쳐 덕수궁으로 내려오니 시청 앞 시계탑이 오후 4시50분을 가리켰다.
시간을 꼭 맞춰 방에 들어가니 이번엔 신 감독 혼자 앉아 있었다.
신 감독은 내게 앉으란 소리도 안 하고 말했다.

“나하고 3년 고생할래?”

귀가 번쩍 뜨였다.
3년 전속 계약하자는 뜻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사무실로 나와.”

그게 바로 합격통지였다.
귀갓길 내내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이었다.
신 감독은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 몸은 중학교 때부터 평행봉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미술에 조예가 있던 그는 눈썰미로 내 근육을 포착한 것이었다.
내 본명은 강신영이다.
신 감독은 ‘뉴 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내게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지어주었다.
며칠 후 각 신문 조간에 다음 같은 기사가 떴다.
‘신성일, 5081대 1 스타 탄생’.
나도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⑫ 적(赤)과 흑(黑)

신성일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1960). 김승호(왼쪽)의 아들로 출연했다. 신성일은 신상옥 감독의 지시로 ‘로맨스 빠빠’ 대본을 김희창 작가에게 받아왔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고백한다.
나의 야망은 또래 젊은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1959년 8월, 508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필름 전속 신인배우로 선발된 다음 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매달 월급 5만환을 받았다.
화폐개혁(1962년 6월 10일) 전인 1959년, 5만환은 엄청난 돈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한 기업인 유한양행의 과장급 월급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방황하던 젊은이였던 내게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후일담이지만 앙드레 김도 내게 기적이 일어난 날, 신필름 신인 배우 오디션에 지망했다가 탈락했다고 한다.

당장 최고 부자 동네인 가회동에 하숙집을 잡았다.
깨끗한 한옥에서 2만 5000환을 내고 독방 하숙을 시작했다.
월급의 반이나 들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다른 젊은이라면 월급을 알뜰살뜰 모아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겠지만 난 달랐다.
스스로를 최고로 대접해야 진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싼 방값은 자존심에 대한 투자였다.

가회동은 전통적으로 양반·나인·상궁 등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집안이 망하기 전까지 나 역시 대구 한옥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촌과 한옥의 분위기를 알았다.
가회동엔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육영수 여사의 오빠 육지수 박사, 대한양회 이정림 회장, 김활란 박사 등이 살았다.

아마 나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처럼 야심 찬 인물이었던 것 같다.
소설에서 적(赤)은 군인을, 흑(黑)은 성직자를 상징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배경이 없는 사람이 출세하는 길은 적, 또는 흑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야심만만한 청년 쥘리앵은 출세를 위해 적의 길을 선택한다.
난 이빨 물고 가회동 생활을 꾸려갔다.


작가 : 한운사 (左), 김희창(右)

우선 인맥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중심은 신필름이었다.
‘춘희’ ‘이 생명 다하도록’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흥행 가도를 달리던 신 감독이 1960년 첫 작품으로 준비하던 영화가 ‘로맨스 빠빠’였다.
신필름 입사 후 얼마 안됐을 무렵, 신 감독은 김희창 작가에게서 ‘로맨스 빠빠’ 대본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신 감독은 나를 ‘로맨스 빠빠’의 막내 아들로 출연시킬 심산이었던 것 같다.

김희창 작가가 누구인가.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최고 인기였다.
일본 VOA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한 그는 라디오 드라마 ‘로맨스 빠빠’ 등을 히트시킨 인기 작가로, 신필름의 각색 작가로도 활동했다.
김 작가 집은 세검정에 있었다.
김 작가 부인이 차 대접을 하는 게 그렇게 정갈할 수 없었다.
인정이 그리웠기에 그 집에서 차 한 잔 대접받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또 심부름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식으로 당대 최고 라디오 드라마 작가 한운사도 만날 수 있었다.
김 작가와 한 동네에 살고 있던 한운사는 ‘빨간 마후라’ ‘남과북’ ‘현해탄은 말 없다’ 등으로 인기 절정이었다.
잦은 심부름을 통해 그와도 인연을 맺었다.
최고 작가들에게 존재를 알리는 것보다 더한 지름길이 어디 있는가.

신필름 사무실에는 6대 신문사 영화 담당기자들이 출입했다.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를 마땅히 받을 사람도 없었고, 있더라도 귀찮아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전화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기자들의 목소리를 익혔다.
영화에 대한 식견과 정보력을 갖춘 그들이었다.
'적과 흑'의 주인공처럼 야심만만했던 난 초년 시절부터 곁에 든든한 우군을 둔 셈이었다.

⑬ 풋내기 배우 데뷔 시절

신성일의 스크린 데뷔작인 ‘로맨스 빠빠’. 당대 은막을 주름잡던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왼쪽부터 최은희·신성일·남궁원·도금봉·김진규·엄앵란·주증녀·김승호.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데뷔작에서 드러난 내 연기 실력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시쳇말로 ‘발연기’인데 가장 짜증냈던 사람이 지금의 아내인 엄앵란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훗날 뼈가 되고, 살이 됐다.

데뷔작은 1960년 1월 1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로맨스 빠빠’였다.
많은 식구를 거느린 월급쟁이 아버지가 실업자가 되자 온 가족이 아버지를 위로해주는 홈드라마였다.
그 당시 최고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김승호·주증녀가 아버지·어머니 역을, 최은희·김진규가 큰누나와 그 남편 역을 맡았다.
김석훈·남궁원·도금봉·엄앵란·주선태·김희갑 등이 조연으로 중량감을 주었다.
신상옥 감독은 나를 막내아들로 기용했다.

촬영은 개봉을 한 달도 안 남긴 시점에서 돌입했다.
세트 촬영 장소는 서울 종암동 개천가에 자리한 연탄공장.
하루 촬영을 끝내고 나면 코가 연탄가루로 시꺼멓게 되곤 했다.

졸지에 엄청난 배우들 틈에 끼었으니 발걸음조차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촬영장 풍경은 한 편의 코미디 드라마 같았다.
영화 ‘마부’로 유명한 김승호 선생은 “준비해라”고 지시한 후 내가 등장하는 컷만 나오면 코를 골고 잤다.
내 존재감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다른 사람들은 막간을 이용해 고스톱을 쳤다.
조명·세트를 설치할 때 틈만 나면 배우들은 무조건 고스톱이었다.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 고스톱이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놀음이 고스톱이다.

동시 녹음이 아니어서 대사에 큰 부담은 없었다.
옆에서 망치 소리가 나도 우리의 촬영에는 전혀 영향 없었다.
그런 까닭 덕에 촬영 속도는 빨랐다.
내가 그간 540편이 넘는 작품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영화를 비롯해 TV 드라마도 초창기에는 컷 없이 한 번에 쭉 찍었다.
심지어 69년 TBC 드라마 ‘124군부대’의 경우 생방송으로 찍어대 아슬아슬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편집 기술도 없거니와 테이프도 아깝다는 이유였다.

녹음실 시스템도 열악했다.
녹음실에는 대사 녹음용 마이크와 음향효과 내는 마이크, 딱 두 개뿐이었다.
녹음용 마이크 하나를 두고 여러 명이 몸싸움을 벌이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음향의 거리감도 배우가 스스로 냈다.
나 같은 초짜 배우는 녹음실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존재이니 말이다.

이 영화는 엄앵란과 처음 연기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연기를 잘 못하는 탓에 점점 주눅이 들었다.
엄앵란은 57년 ‘단종애사’로 데뷔한 이후 청춘 스타로 떠올랐고,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여동생 역인 엄앵란은 나와 엮이는 장면만 되면 쭈뼛거렸다.
같이 연기하기 싫다는 짜증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당시 내 공군 형님은 수원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수원과 내 가회동 하숙집을 왔다 갔다 하셨다.
난 기억이 없는데 어머니는 그 때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매번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엄앵란이 콧대 세고, 건방지다”고 말이다.
내가 엄앵란을 무의식적으로 욕했던 것이다.
그런 우리가 부부가 되다니.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⑭ 굴욕의 시간

신성일의 두 번째 영화 ‘백사부인’(1960)에서 주연한 최은희.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폐기처분.
이보다 1960~61년 내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신필름 전속배우로 발탁된 나는 겉으론 멀쩡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60년 정월 초하루 개봉한 ‘로맨스 빠빠’로 한껏 기대를 받으며 데뷔했으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낙제점이었다.

그 해 여름 안양 관악산 꼭대기에서 영화 ‘여인(麗人)’ 촬영이 있었다.
포지션이 없는 신인배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촬영장 스태프로 동원되기도 했다.
폭염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30㎏이 넘는 24볼트 자동차 배터리 나무상자를 옮겨야 했다.
당시에는 자동차 배터리를 연결해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두 손으로 낑낑거리며 관악산 밑에서부터 산꼭대기로 옮겼다.
당연히 내가 가장 늦게 도착했다.
산꼭대기라 그늘도 많지 않았는데,
그것마저 선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땀이 비오 듯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카메라는 커버에 씌워져 그늘에 놓여 있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그 옆에 자동차 배터리 나무상자를 놓고, 엉덩이로 깔고 앉았다.
그 때 등 뒤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야, 임마. 기계 위에 앉지마!”

최경옥 일급촬영기사가 내 엉덩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대스타 최은희의 동생이자 신상옥 감독의 처남으로, 신필름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이었다.
산에 올라온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아프기도 했지만 부끄럽고 억울했다.
평소 배터리 상자를 스스럼 없이 밟고 올라섰던 그들이었다.
치욕적이었다.
내가 인정받은 신인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선배들의 눈에 난 값어치가 없는 존재였다.

그 해 신필름의 신작 ‘백사부인’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었다.
‘백사부인’은 중국 고전 괴기담을 각색한 작품으로 뱀으로 둔갑한 중년 미인이 연하의 젊은 남자를 유혹하는 내용이었다.
신 감독은 다음 해 개봉할 ‘성춘향’의 예비작 개념으로 ‘백사부인’을 찍으며 나와 최은희의 호흡을 테스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신 감독이 요구한 키스신 에서 최은희에게 입술을 갖다 대지도 못했다.
하늘 같이 모시는 스승 신 감독의 부인이 아니었던가.
신 감독은 촬영을 중단하고 점심을 먹으며 말했다.

“성일아, 너 연애 해봤냐? 나이 먹은 여자와 연애해봐.“

이 말은 내 머리 속에 하나의 계시처럼 꽂혔다.
훗날 내가 여드름 투성이의 신인 나훈아에게 “연상의 여자와 연애하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내 존재를 입증하지 못했다.
61년 신필름의 이형표 감독이 청춘영화 ‘아름다운 수의’를 제작했다.
모든 정황상 당연히 내가 주인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주인공은 신필름 소속이 아니라 외부에서 수혈됐다.
‘현해탄은 말이 없다’의 주인공 이상사와 신인 태현실이 남녀 주연으로 발탁됐다.

모든 게 자명했다.
신성일이란 인간은 신필름에서 쓸모 없는 존재였다.
이 사건을 처음 고백한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굴욕과 모멸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분발의 계기가 됐다.
배우 인생을 걸고 승부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⑮ ‘성춘향’ vs ‘춘향전’

국내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와이드스크린)로 주목 받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에서 타이틀 롤 춘향을 맡은 최은희. [김한용 사진집 『꿈의 공장』(눈빛·2011)에서]

지난달 말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 메시와 호날두의 대결을 지켜보며 밤잠을 설쳤다.
놀라운 개인 돌파로 레알 마드리드 수비진을 무너뜨리고 골을 넣은 메시는 숙명의 라이벌 대결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떠올랐다.

1961년 1월 영화 ‘성춘향’과 ‘춘향전’의 승부가 그러했다.
신상옥 감옥의 신필름이 제작한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의 선민영화사가 제작한 ‘춘향전’은 당대 최고 감독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다.
열흘 간격으로 개봉했을 정도로 양자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승부였다.

신필름은 이 영화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나는 숨을 죽이며 이 대단한 전쟁을 지켜보았다.
당시 이만한 화젯거리도 없었다.
‘성춘향’은 김진규·최은희가, ‘춘향전’은 신귀식·김지미가 이몽룡과 춘향으로 나섰다.
‘성춘향’의 최은희와 ‘춘향전’의 김지미라는 최고 여배우의 맞대결이었을 뿐 아니라 신상옥·최은희 부부, 홍성기·김지미 부부의 벼랑 끝 승부이기도 했다.

원래 신필름이 ‘춘향전’ 제작에 들어갔는데 신필름에서 일하던 제작자 박운삼씨가 홍성기 감독 쪽에 붙으면서 두 회사가 ‘춘향전’ 경쟁에 나서게 됐다.
뒤늦게 뛰어든 선민영화사가 일정을 단축하며 1월 18일 국제극장에서 먼저 개봉했다.
신필름은 그로부터 열흘 후 명보극장에 작품을 올렸다.

결과는 싱거웠다.
‘성춘향’(107분)의 완승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성춘향’은 장장 74일간 관객 38만 명을 동원하며 한국영화·외화 통틀어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
반면 ‘춘향전’(110분)은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언론도 비판적이었다.
‘새로운 해석이 없을 바에야 차라리 원본의 풍자성이나 개그를 살렸으면 좋았을 것’
‘어설픈 다이제스트로 극적인 악센트가 약했다’
‘홍성기 감독의 평면적인 연출과 캐스트의 빈곤으로 덤덤한 뒷맛’
‘한 가닥 기대했던 코스튬 플레이도 세트가 빈약해 어그러졌다’ 등의 응이었다.

‘성춘향’은 캐스팅에서도 ‘춘향전’을 압도했다.
김진규·최은희 외에도, 방자 허장강, 향단 도금봉, 월매 한은진, 변학도 이예춘, 목낭천(睦郎廳· 목가 성의 줏대 없는 관리) 양석천 등 쟁쟁한 연기파 배우가 포진했고,
양훈·김희갑·구봉서 등이 배꼽 빠지는 코미디를 연기했다.
또한 국내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와이드스크린 방식의 대형영화)로 주목 받았다.
신 감독은 고가의 코닥필름을 사용했고, 햇빛이 필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세심하게 고려해 최고의 화질을 구현했다.
오후 3시 이후에는 색이 잘 밀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촬영을 중단했다.
필름 현상도 한국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했다.
신필름은 서두르지 않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 결과 ‘성춘향’의 화면은 유리알처럼 선명했고, ‘춘향전’은 칙칙했다.

신필름은 ‘성춘향’에 이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라이벌 선민영화사를 거꾸러뜨렸다.
선민영화사는 ‘춘향전’의 실패로 문을 닫게 됐고, 힘든 상황에 직면한 홍 감독과 김지미는 다음 해 3월 1일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다.
나 역시 경쟁의 비정함에 몸을 떨었다.

(16) 첫사랑 혜화동 여인

1970년대 어머니와 함께한 신성일씨.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그였지만 60년대 초 데뷔 시절 그는 연기에서도, 사랑에서도 풋내기였다. [중앙포토]

원숙한 여인과의 사랑.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처럼, 내가 생애 처음으로 경험한 사랑의 형태였다.

196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내일이면 크리스마스’라는 설렘이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로맨스 빠빠’에 출연하면서 나름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지만 나는 아직 초짜 배우의 티를 벗지 못했다.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당시 신필름에 정동일이라는 견습 배우가 있었다.
나이도 같고, 처지도 비슷해 우리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우리의 호주머니는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5만환이라는 비교적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돌아서면 돈이 없었다.
신필름에서 내 월급 지불은 가장 후순위였다.
월급이 한 달씩 늦게 나오다 보니 ‘외상 인생’이 돼 버렸다.
가회동 하숙비는 매번 한 달씩 밀렸고, 신필름 주변 다방과 당구장에도 늘 외상이 달려 있었다.
그 날 정동일은 우울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내게 “좋은 데 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마음이 너무 허전해 아무데나 끌려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동일의 손에 끌려 지금의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 맞은편의 감리회관 다방에 갔다.
다방 마담은 굉장히 인심 좋게 생긴 여인이었다.
정동일은 평소 그 여인과 친한 모양이었다.
마담은 밤이 되자 다방 문을 닫고, 자신의 친구들이 모이는 혜화동의 어느 한옥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혜화동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그 집은 ‘ㄷ’자 형태로 제대로 된 한옥의 전형이었다.

그 곳엔 마담의 친구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채에 상을 근사하게 차려서 내왔다.
남자라곤 우리 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야심가였던 나는 주변에 앉아있던 여인들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보다 7~8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월급은 밀려있는데 돈은 어디서 구하고 생활을 어떻게 꾸려가나, 신필름에서 어떤 작품으로 성공할 것인가라는 생각만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술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나가 떨어졌다.
내가 마신 술은 위스키였던 것 같다.
그 위스키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것이리라.

일어나 보니 정동일과 마담 친구들이 모두 한 방에서 자고 있었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어차피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목이 마르고 오줌이 마려워 견딜 수 없었다.
비틀거리면서 살펴보니 화장실은 대청마루에서 15m쯤 떨어진 대문 쪽에 있었다.
그 날 따라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있었다.
화장실에서 마당으로 나왔는데 대청마루에 웬 여인이 서 있는 것 아닌가!
세상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 여인은 드레스 같은 아름다운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성일아, 너 연애 해봤냐? 나이 먹은 여자와 사귀어 봐.”

일전에 신상옥 감독이 ‘백사부인’을 촬영하며 최은희와 키스하지 못하는 내게 충고했던 이 말이다.
머리 속에 하나의 계시처럼 메모리돼 있던 이 말이 그 순간 암호 풀린 컴퓨터 파일처럼 작동했던 것 같다.
여자와 키스 신도 제대로 못해내면서 무슨 배우냐는 자책감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터였다.
신 감독은 이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까.

홀린 듯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슬며시 끌었다.
나는 거부하지 못한 채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17) 깜짝 생일선물

1963년 신성일씨가 김지미와 함께 주연한 영화 ‘77번 미스 김’의 한 장면. 신필름 신인배우였던 신성일씨도 연기자의 면모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인기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이런 인연이 있을까!

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전날(1960년 12월 24일) 밤 어울린 다른 일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연 이 여인이 사람일까, 천년 묵은 백사가 미인으로 변신한 백사부인이 이 곳에 환생한 것일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시계 무역회사 사장의 둘째 부인으로 나보다 8살 연상이었다.
사장은 그 집에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들렀다.
우리는 하룻밤을 보낸 후 연인으로 맺어졌다.

62년 접어들 무렵 신필림은 더욱 큰 회사로 변모해갔다.
박정희 정권이 그 해 1월부터 영화법을 제정해 59년 71개에 이르는 영화사 및 군소 프로덕션을 16개로 통폐합시켰다.
군소업자들이 영화를 만들 수 없도록 제한하는, 메이저 컴퍼니 중심의 법안이었다.
신필름은 홍콩에서 200개 이상의 극장을 소유한 거대 프로덕션 란란쇼와 긴밀하게 교류하며 독주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신필름에서 신인 신성일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우리의 관계는 내가 62년 11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면서 변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나는 하늘을 치솟을 듯한 인기를 타며 엄청나게 바빠졌다.
김지미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77번 미스 김’은 ‘아낌없이 주련다’ 직후 촬영했다.
당연히 자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 여인을 만난다고 해도 혜화동 집에서만 가능했다.
당시 통신시설이 좋지 않았다.
큰 회사나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면 백색전화(소유자의 이름으로 가설되는 개인 전화)를 구경하기 어려웠다.
63년 5월 ‘새엄마’를 찍고 있을 때의 일이다.
너무 바쁜 탓에 그 여인과 관계는 유지했지만 잘 만나지 못했다.
엄앵란이 새엄마, 김진규가 아버지, 최지희가 여동생, 내가 아들로 출연한 이 영화는 아들이 새엄마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촬영장은 서라벌예대 근처 채석장 밑에 자리한 미아리 세트장이었다.
밤 촬영을 위해 서소문 기상척후소 옆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옮길 준비를 하던 차, 나는 막간을 이용해 여인에게 전화를 했다.
뜻밖에, 혜화동 집에 꼭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미아리 세트장에서 엄앵란의 차를 함께 타고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하던 중 혜화동 로타리에서 내렸다.
거기서 여인의 집까진 250m 거리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갔다.
허겁지겁 한옥집에 도착하니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여인은 방에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은 채 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5월 8일)이 생일이죠.”

나도 몰랐던 생일상이었다.
가슴에서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여인은 내 손을 끌어당겨 영화 소품으로 차고 있던 세이코 가죽 손목시계를 끄른 뒤 새 시계를 채워주었다.
금빛이 번쩍거리는 롤렉스 콤비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구경할 수 있는 최고의 시계였다.
그 여인은 원래 차고 있던 학생용 손목시계를 문 밖으로 내던졌다.
나는 그 집을 떠날 때 손목시계를 주어갔다.
영화 소품이라 잃어버리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5월의 해는 짧지 않았다.
촬영 현장은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나만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 다른 배우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아들이 술 먹고 집에 들어가는데 새어머니와 여동생이 문을 열며 마중 나온 촬영 장면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엄앵란과 최지희가 날 보더니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게 아닌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18) 어머니의 눈물

196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상을 받았지만 첫사랑이 시상자로 나섰던 65년 시민회관 시상식장을 잊지 못한다. 영화배우 문희(왼쪽)씨와 동반 수상한 60년대 한 영화제에서. [중앙포토]

한 번 터진 두 처녀 배우들의 웃음보는 5분 내내 멈출 줄 몰랐다.
엄앵란과 최지희는 웃음을 그칠 만하면 내 얼굴을 다시 보고 킥킥거렸다.
영화 ‘새엄마’ 촬영은 엉망이 됐다.
불과 한 시간 전에 혜화동 여인을 만나고 온 터라, 내게 약간의 죄의식이 있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묻은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왜 저럴까.

가만 보니 두 사람의 눈은 내 목덜미로 향해 있었다.
거울을 보니 목덜미에 키스 마크가 시커멓게 나 있었다.
혜화동 여인이 내 목을 심하게 압박한 것이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풋내기 배우가 아니었다.
‘가정교사’ ‘사나이의 눈물’ ‘김약국의 딸들’ 등이 1963년 같은 해에 출연한 작품들이었다.
태연하게 상황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를 향해 웃으며 소리 질렀다.

“그만 웃고. 자 자, 슈팅 갑시다.”

두 사람은 내게 어디 갔다 왔느냐며 물었다.
돌이켜 보니, 당시 엄앵란뿐 아니라 최지희도 내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나를 성실하고 전도유망한 남자로 본 것 같다.
키스 마크를 낸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사실을 직감한 엄앵란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날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여자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하지 않았나 싶다.
이후 엄앵란은 내가 촬영 중간에 어디로 사라지지 못하게 감시하고, 점심 도시락까지 싸오는 등 나를 챙겨주였다.

혜화동 여인이 준 롤렉스 시계는 가회동 하숙방 책상에 올려놓고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 방에는 배우 생활 중에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물건이 쌓여갔다.
촬영장과 연락하기 위해 백색전화를 놓았다.
갖가지 옷과 이불 보따리도 사들였다.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하시며 모든 물건을 관리했다.

어느 날 롤렉스 시계를 눈 여겨본 어머니가 “이 시계 어디서 났어?”라고 물어왔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촬영장으로 나가버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어머니와 혜화동 여인이 처음으로 대면을 했다.
혜화동 여인은 내 겉옷과 속옷을 세탁해 가회동으로 들고 왔는데, 마침 어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머니는 인사만 하고 그 여인의 전화번호를 받아놓았다.
얼마 후 어머니는 혜화동 여인을 찾아갔다.
내 장래를 걱정한 어머니는 “당신과 우리 아들은 안 맞는다. 우리 아들은 영화계에서 크게 될 인물이니 그만 만나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 여인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두 여인은 그 자리에서 서로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 여인과의 관계를 정리시켜준 셈이다.

그로부터 2년 후 한 영화잡지가 주최한 영화 시상식이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한 회사가 그 행사의 스폰서로 나섰다.
수상자로서 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서 있는데 그 여인이 시상자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혜화동 여인은 눈으로만 내게 인사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 아는 인사였다.

상을 받으면서 악수를 하는데 그 여인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건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내 눈에도, 그 여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 날의 부상(副賞)이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게 내가 본 혜화동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9) 국립극단 탈출기

아버지처럼 이끌어준 연극 연출가 고(故) 이해랑 선생(맨 왼쪽)의 조언으로 신성일은 1960년대 초 잠시 연극배우의 길을 기웃거렸다. 가운데는 배우 김동원, 오른쪽은 원로 연출가 이원경. [중앙포토]

단 한 번의 선택이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국립극단과의 만남은 나를 그 기로에 세웠던 사건이다.

1960년 정월 초하루 개봉한 신필름의 영화 ‘로맨스 빠빠’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쟁쟁한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내 연기력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폐기 처분 직전의 신인으로서 회사 내에서 찬밥 신세였다.
벼랑 끝에 선듯하던 62년 초, 평소 내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던 이해랑 선생(1916~89)이 “연극 한 번 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라고 권유했다.
당시 국립극장은 ‘민극(民劇)’과 ‘신협(新協)’을 전속단체로 두고 있었는데 이 선생은 신협의 대표였다.
배우전문학원에 다닐 때 나를 가르쳤던 연극연출가 이진순(1916~84) 선생과의 인연도 있고 해서 이 선생을 알게 됐다.


연출가 이진순(左), 박진(右)

연극계의 거물답지 않게 인자하고 소탈한 이 선생은, 연극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1959), ‘안네 프랑크의 일기’(1960), ‘미풍’(1961) 등을 발표하며 연출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원래 그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연극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집안에서 내팽개쳐진 아들이 됐지만 연극계를 발판으로 국회의원으로 발돋움했다.
71년 문화예술계 인사로는 처음 공화당 비례대표제 의원으로 선출됐다.
나는 성격이 화통했던 그를 좋아했다.

이 선생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국립극단이 ‘젊음의 찬가’를 준비하던 중에 내가 뛰어들게 됐다.

 

연기력을 높이는 데는 국립극단만한 곳이 없었다.
국립극단은 연극계의 정통이었고, 배우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게다가 이 선생의 선배인 박진(1905~74) 선생이 연출한 ‘젊음의 찬가’는 젊은이의 패기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 이미지에 어울렸다.
나는 박성대란 배우와 함께 젊은이 배역으로 더블 캐스팅됐다.
국립극장이 ‘시공관’(현 서울시의회)에서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으로 옮겨온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나는 연습 한 달 만에 실망감에 빠졌다.
국립극단 배우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내 눈으로 볼 때는 너무 어려웠다.
출연진이 어울려 식사를 한 기억이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기껏해야 자장면이고, 대체로 화덕 불에 감자·고구마를 구워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연극 배우들은 생기가 없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극단이라는 집단이 이 정도 형편이구나’라고 절감했다.

신필름의 경우 배우들이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돼지뼈 콩비지를 주로 먹었다.
거기에 시큼한 김치를 넣어 끓여주면 그 이상 보양식이 없었다.
한 그릇에 500원이었는데 신필름 식대가 그쯤 나왔다.
나 역시 동료들과 그런 음식을 같이 먹으며 기운을 얻었다.

62년 4월 5일 밤.
‘젊음의 찬가’ 첫 공연의 전야였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돈을 벌려고 영화계에 투신했는데 연극에 발 담그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라는 갈등이 생기며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나와 연극은 길이 달랐다.
결국 그 날로 연극과 연을 끊고 ‘젊음의 찬가’ 무대에도 서지 않았다.
그 후 영화로 승승장구하는 나를 본 이해랑 선생은 “그래, 넌 연극하지 말고 영화나 해라”고 말씀하셨다.

돌아보니 그 선택은 옳았다.
연극 무대에 서지 않은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신필름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와 연극, 양쪽을 비교할 수 있었다.
국립극단만 보고 연극을 선택했다면 지금까지 그 곳에 머물러 있었을지 모른다.
연극 무대는 내 야망을 담아내기엔 턱없이 좁았다.

(20) 운명의 대본

신필름 소속이었던 신성일은 극동흥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기 위해 ‘계약 만료’란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한용 사진집 『꿈의 공장』(눈빛·2011)에서]

인생에서 기회가 세 번은 온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께선 내가 어린 시절부터 ‘기회는 앞머리 털밖에 없다.
오면 정면으로 움켜잡아야 한다’는 일본 속담을 들려주셨다.
나는 그 속담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59년 신필름 입사에 이어 62년 여름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신필름에 걸려오는 전화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작가 및 영화 담당기자들의 목소리를 익힌 효과가 나타났다.
어느 날 영화 담당 기자단 간사 격인 동아일보 호현찬 기자가 나를 불렀다.
그가 내놓은 것은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의 대본이었다.
그 무렵 엄청난 인기 속에 막을 내린 한운사의 라디오 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를 극동흥업이 영화로 제작하게 된 것이었다.
호 기자에 따르면 20일 뒤 크랭크인 예정인데 감독은 유현목, 여주인공은 이민자로 확정됐다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최무룡이 유력하지만 여기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는 얘기였다.


영화감독 유현목(左), 저널리스트 호현찬(右)

이 영화의 기획에 참여하고 있던 호 기자는 남자 주인공으로 나를 밀었다.
영화계 일각에선 젊은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호 기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아낌없이 주련다’는 6·25의 피난처가 된 부산 바닷가를 배경으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전쟁 미망인과 피난 온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대본이 워낙 훌륭해서 출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문제는 신필름이 아닌, 극동흥업의 작품이라는 데 있었다.

한 작가와 호 기자는 최무룡 기용을 반대했다.
연상의 여자 이야기인데 최무룡은 이민자와 동년배라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신인 연기자를 좋아하지 않는 유현목 감독은 “신성일이 도대체 누구야?”라며 최무룡을 지지했다.
김기영·이만희 감독은 신인을 가르쳐가며 촬영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유 감독은 그렇지 않았다.
유 감독은 61년 ‘오발탄’으로 실력을 크게 인정받은 상태였다.

나는 이 작품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신필름에선 월급만 타가는 찬밥 신세.
그러나 다른 회사의 영화였기에 출연하려면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신상옥 감독은 홍콩 출장 중이었다.
하루 이틀 기다려도 신 감독 소식은 없었다.
호 기자에게 독촉이 오는데 초초해 죽을 지경이었다.
선배 남궁원에게 “형님, 외부에서 책(대본)이 하나 왔는데 신필름에서 출연 허락 받지 못하면 일단 뛰쳐나가야 할 형편입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나가면 밥 굶는다. 월급 타서 쓰는 게 편하지 않겠니”라며 나를 말렸다.
급한 마음에 신 감독의 부인 최은희를 찾아갔다.

그 날 최은희는 신당동에 자리한 도금봉 집에서 도금봉·한은진·남궁원과 어울려 마작을 하고 있었다.
네 명이 마작에 열중하고 있던 터라 용건을 꺼낼 기회가 없었다.
쉬는 시간까지 기다려서 최은희에게 겨우 말을 붙일 수 있었다.

“최 여사님, 다른 영화사에서 책이 왔는데 출연을 승낙 받고 싶습니다.
신 감독님이 안 계셔서 이렇게 왔습니다.”

“신 감독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허락해요?
신 감독 올 때까지 기다려요!”

최은희는 매몰차게 딱 잘라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때 남궁원이 얼마 전 신필름과 전속 재계약을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게는 재계약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나도 3년 전속 계약을 했으니 끝날 때가 다 된 시점이었다.
계약 만료, 이것이 내게 남은 최후의 카드였다.

계속

編輯 ... 張河多 多張印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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