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맨발이다 - 인생은 맨발 마라톤…도전하라
(31) 스포츠머리의 원조
1963년 상영된 ‘가정교사’. 신성일(왼쪽)이 처음으로 스포츠머리를 선보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젊음은 거칠 게 없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 힘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가 ‘가정교사’(1963)다.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면서 극동흥업에 자주 드나드는 관계가 됐다.
‘아낌없이 주련다’ 이후 또 한 번 성공을 노린 극동흥업은 일본 작가 고미가와 준페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가정교사’의 판권을 정식으로 샀다.
지금도 일본 최고 배우로 추앙 받는 이시하라 유지로와 요시나가 사유리가 남녀 주연하며 대성공한 작품이었다.
주인집 이복형제가 가정교사인 여주인공을 서로 좋아한다는 이야기였다.
시나리오 작가 서윤성이 한국식으로 각색을 했는데 대본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나는 원작소설을 구해 읽기까지 했다.
어느 날 극동흥업에 갔더니, 차태진 사장이 ‘가정교사’ 스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 사장과 김기덕 감독은 남자 주인공을 놓고 고민 중이었다.
나는 명동 뒷골목에서 구한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을 읽고 유지로의 스포츠머리를 알고 있었다.
반항적 이미지의 청춘스타로 떠오른 유지로는 소설가로 명성을 떨친 이시하라 신타로 현 도쿄 도지사의 친동생이었다.
서윤성 작가(左), 김기덕 감독(右)
이시하라 형제는 전후(戰後) 일본 문화계를 휩쓸었다.형 신타로는 55년 발표한 소설 『태양의 계절』에서 태평양전쟁 패배 후 몰락하는 황족의 후예와 기성 질서에 반항하는 젊은이를 그렸다.
‘태양족(太陽族)’이라는 용어도 유행시켰다.
동생 유지로는 일본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체격이 훤칠했다.
액션에 능하고, 노래도 매력적인 청춘영화의 대명사였다.
그가 62년 부른 ‘빨간 손수건(赤いハンカチ)’은 NHK가 발표한 ‘20세기 일본의 노래 100곡 안에 들어 있다.
차 사장이 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을 때 ‘앗싸리(일본어로 산뜻하다는 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유지로의 스포츠머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가정교사’는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내게 꼭 맞는 영화였다.
나는 차 사장에게 당돌하게 말했다.
“나 머리 깎습니다.”
차 사장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길로 충무로 라이온스 호텔 1층 이발소로 가 스포츠머리로 깎았다.
‘아낌없이 주련다’ 때는 긴 머리였으니 180도 이미지 변신이었다.
차 사장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배역은 그 다음 날 차 사장과 김 감독이 내 머리를 보고 싱긋 웃은 걸로 결정됐다.
예상대로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나는 반항적인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굳혔다.
그 전까지 어떤 영화배우도 스포츠머리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 영화로 스포츠머리가 유행하게 됐다.
시골 이발소에선 “신성일 머리로 깎아달라”는 주문이 크게 늘어났다.
내 스포츠머리는 요즘의 퍼머 이상으로 돈이 많이 들었다.
군인머리처럼 휙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나흘에 한 번씩 다듬어야 했다.
64년 최고 히트작인 ‘맨발의 청춘’을 비롯해 상당수 청춘물을 이 머리로 소화해냈다.
난 대한민국 스포츠머리의 원조인 셈이다.
‘한국의 이시하라 유지로’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한국의 신성일, 일본의 이시하라 유지로, 미국의 폴 뉴먼이 같은 계열의 배우라 할 수 있다.
난 서서히 ‘맨발의 청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32) 스파이 작전
오늘의 신성일을 만든 ‘맨발의 청춘’(1964)에서 엄앵란(오른쪽)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신성일과 엄앵란은 다른 영화사에서 들은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극동흥업에 넘겼다.
나와 엄앵란이 스파이가 된 적이 있다.
내 최대 히트작인 ‘맨발의 청춘’이 스파이 작전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반드시 짚어야 할 작품이 있다.
1963년 나온 ‘청춘교실’이다.
조선일보는 이 무렵 광화문 사옥 옆에 운영하던 시네마극장을 한국영화 전용극장인 아카데미극장으로 바꾸었다.
방우영 조선일보 전무는 김연준 한양대 총장에게 연극영화과와 영화사를 설립해 아카데미극장 개관 영화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바람에 생긴 게 한양영화사였고, 아카데미극장 개관 프로그램으로 일본 작품이 원작인 ‘청춘교실’을 기획했다.
‘아낌없이 주련다’ ‘가정교사’ 등으로 입지를 굳힌 나는 엄앵란·최지희·남미리·방성자 등과 함께 캐스팅됐다.
‘청춘교실’의 배경은 대학교였다.
김수용 감독은 촬영무대를 건국대 캠퍼스로 잡았다.
당시 캠퍼스에 호수가 있는 학교는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발랄한 젊은이들의 상을 그려 크게 히트했다.
이후 아카데미극장은 청춘영화 전용극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로비가 긴 복도로 돼 있고, 그 양쪽을 열대어 수족관으로 장식해 젊은이들의 눈길을 잡았다.
열대어를 감상하며 15m 이상 걸어 들어가야 했으니 당시로선 명물이었다.
한양영화사는 ‘청춘교실’을 히트시킨 다음 또 다른 청춘물을 아카데미극장에 걸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청춘교실’로 인연을 맺은 한양영화사의 최모 기획실장이 나와 엄앵란을 불러 식사를 사며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을 들려주었다.
훗날 ‘맨발의 청춘’이 된 기획이었다.
“일본에서 히트한 작품이 있어. 남자는 뒷골목 젊은이고, 여자는 대사의 딸이지. 결국 두 사람의 자살로 끝나는 작품이야. 딱 둘이서 하면 되겠다.”
일본 원작의 제목은 ‘맨발의 청춘’이 아니었다.
‘맨발의 청춘’은 최 실장이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었다.
선배 격인 그는 개인 생각을 들려준 것일 뿐, 이 작품을 회사에 정식 제안하진 않은 것 같았다.
나와 엄앵란은 이미 여러 영화에서 호흡을 맞춰 각 영화사의 분위기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가정교사’로 극동흥업, ‘청춘교실’로 한양영화사의 분위기를 비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작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는 곳은 극동흥업이라고 생각했다.
한양영화사는 규모만 클 뿐, 작품을 알차게 만드는 시스템이 부족했다.
극동흥업은 김기덕이란 유망 감독을 전속으로 두고 있었다.
내 생각을 엄앵란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그 기획을 극동흥업에 넘기기로 했다.
‘맨발의 청춘’이란 기획에 깜짝 놀란 극동흥업의 차태진 사장은 우리 말을 대번에 알아 들었다.
곧바로 ‘가정교사’를 각색한 서윤성 작가를 중심으로 대본 입수작업이 이루어졌다.
시나리오는 그 다음 날로 극동흥업에 들어왔다.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니가츠(日活)사 작품이었는데, 서 작가가 일본 라인을 통해 구한 것이었다.
극동흥업은 기획과 동시에 촬영에 들어갔고, 결국 ‘맨발의 청춘’은 64년 초 아카데미극장에 걸렸다.
만약 ‘맨발의 청춘’이 한양영화사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돌아보면 내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나름대로 성공한 스파이 작전이었다.
신 작가는 서울 5개 대학의 말띠 여대생(42년생), 그 오빠와 가족까지 합하면 엄청난 숫자라고 떠벌리며 그 절반만 극장에 들어도 성공한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33) 복싱영화 두 편
신성일 주연의 영화 ‘가정교사’(1963). 신성일(가운데)은 이 시기에 ‘청춘교실’ ‘가슴에 꿈은 가득히’ 등으로 청춘영화 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크다. 인기 스포츠는 언제나 영화의 주된 소재다.
1960년대는 농구·권투·레슬링·야구의 시대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두 편의 권투영화 ‘가슴에 꿈은 가득히’(1963)와 ‘오늘은 왕’(1966)에 출연했다.
영화를 찍으면 두들겨 맞은 기억이 난다.
63년 2월 서울 장충체육관이 건립되면서 실내 스포츠가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전까지는 서울운동장 야구장 홈베이스 쪽에 링을 만들거나 수영장에 무대를 설치해 권투 경기를 열었다.
농구는 박신자, 권투는 강세철·서강일·김기수, 레슬링은 김일 같은 스타를 배출해 인기몰이를 해나갔다.
고교·실업야구에선 유백만이 떠오르는 별이었다.
장충체육관의 스케줄이 빡빡할 땐 인근 장충공원에 링이 설치됐다.
레슬링 열혈팬인 아내 엄앵란은 64년 결혼 후에도 아기를 데리고 장충공원을 찾곤 했다.
장영철·김일·천기덕 등이 링에 오르면 그렇게 좋아했다.
링 위가 아수라장이 되면 아내는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 죽인다, 사람 죽여~.”
주최 측으로선 얼마나 고마웠을까.
장내 아나운서는 기다렸다는 듯 “엄앵란씨, 좀 조용히 하세요”라고 경고 코멘트를 날렸다.
그러면 구경꾼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개싸움도 장충공원의 인기 이벤트였다.
아내는 개싸움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결혼 후 아기를 기르며 살던 무료함을 달랬던 것이다.
아내가 그 동네를 좋아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충체육관 인근에 태극당 빵집 장충동 분점과 족발거리가 들어섰다.
결혼 후 이태원 182번지에 집을 얻은 나는 젖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촬영에서 돌아올 땐 장충동 족발을 사다 주었다.
내가 권투영화 주인공을 맡게 된 데는 두 편의 외화가 영향을 미쳤다.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한 ‘챔피언’, 이탈리아계 이민자로 49전 전승을 거둔 록키 마르시아노를 그린 폴 뉴먼의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이 두 영화는 권투 장면이 실감나고 감동적이었다.
슬로모션으로 주인공 얼굴이 찌그러지고 피가 터지는데, 박진감이 철철 넘쳐 흘렀다.
미국은 이런 장면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 메커니즘이 있었지만 우리는 없었다.
때리는 장면은 화면을 거꾸로 돌리는 리와인드 장치를 사용하면 훨씬 실감난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땐 넘을 수 없는 한계였다.
복싱장면을 찍으려면 정말로 때리고 맞아야 했다.
‘가슴에 꿈은 가득히’는 명보극장에서 을지로 쪽으로 가는 길에 있던 한국체육관에서 촬영했다.
권투·역도·보디빌딩 등에서 나름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였던 곳이었다.
권투 연습생 출신이 내 상대역으로 나왔다.
나도 많이 맞기는 했지만, 내가 챔피언이 되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더 맞은 것 같다.
장충체육관을 빌려서 촬영한 ‘오늘은 왕’ 때는 내 매니저와 싸웠다.
매니저는 권투 선수 출신인데다 나와 키가 비슷했다.
내가 마음껏 때리는 바람에 매니저의 코에서 코피가 났다.
슬슬 열이 오른 매니저가 진짜 실력을 보였고, 나는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아침이면 장소를 비워주어야 했기에 우리는 밤샘 촬영을 했다.
권투영화에선 실컷 얻어맞기만 했다.
외화의 실감나는 권투 장면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34) 청춘영화 전쟁
신성일 주연의 영화 ‘말띠 여대생’(1964년). 말띠 여대생으로 출연한 최지희·남미리와 남자배우 윤일봉(왼쪽부터)이 파티를 벌이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60년대 초반, 힘겨운 시대의 젊은이들은 배출구를 필요로 했다. >br>‘신성일·엄앵란표’ 청춘영화는 반항과 희망이라는 야누스의 얼굴로 그 시대를 휩쓸었다.
영화계에선 청춘영화를 선점을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여졌다.
극동흥업이 63년 3월 ‘가정교사’로 포문을 열었다.
한양영화사는 그 해 8월 ‘청춘교실’을 아카데미극장 개관작으로 내걸었다.
두 영화사의 전쟁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작품이 64년 정월 초하루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한 ‘말띠 여대생’이었다.
‘청춘교실’을 각색하고 ‘맨발의 청춘’을 기획한 사람은 당시 한양영화사의 작가실장이던 신봉승 작가였다.
그는 80~90년대 ‘풍운’ ‘조선왕조 5백년’ ‘찬란한 여명’ ‘여인들의 타국’ 등을 발표하며 TV 사극을 장악했다.
신 작가와 연극연출가 출신의 한양영화사 최현민 기획실장이 비밀리에 추진한 작품이 ‘맨발의 청춘’이었다.
나와 엄앵란은 이 기획을 극동흥업으로 넘겼고, 극동흥업은 작품 등록을 먼저 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한양영화사는 닭 쫓던 개 꼴이 됐다.
회사를 먹여 살릴 큰 기획이 날아가버렸으니….
신 작가와 최 실장은 밤마다 술상을 엎으며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 울분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던 그들은 한양영화사를 위한 새로운 기획을 내놓아야 했다.
신 작가는 이화여대 출신의 한 작가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다.
여대 기숙사를 소재로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말띠 여인들은 ‘기가 세다’ ‘팔자가 드세다’ 등의 속설에 시달렸다.
말띠 여인들(42·54·66 년생)은 결혼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영화는 이런 고정관념을 재기 발랄하게 뒤집었다.
실제로 아카데미극장에서 12만 명을 동원했으니 계산이 적중한 셈이었다.
신 작가의 재능은 이때부터 번뜩이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는 발로 써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그는 금남(禁男) 구역인 이화여대 기숙사까지 들어가진 못했지만, 기숙사 여대생들을 취재하며 ‘말띠 여대생’을 집필했다.
내가 기숙사 주변 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청년, 황정순이 사감, 엄앵란·남미리·최지희·방성자 등이 말띠 여대생 역을 맡았다.
한양영화사는 ‘말띠 여대생’을 64년 아카데미극장 신정 작품으로 잡아놓았다.
시나리오 집필이 끝난 후 개봉일까지 남은 날수는 꼭 한 달.신필름의 이형표 감독이 촬영한 게 특이한 점이다.
이 짧은 기간 안에 촬영·녹음까지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이 감독뿐이라는 중론 때문이었다.
이 감독은 대단한 스피드로, 깔끔하게 촬영을 끝마쳤다.
말띠 해인 66년에는 김기덕 감독의 ‘말띠 신부’가 그 후속으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말띠 신부들은 거짓 임신을 빌미로 남편에게 온갖 봉사와 금욕을 강요하거나, 친구를 성희롱한 사장을 혼쭐내며 말띠 여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꼬집었다.
‘맨발의 청춘’의 대타로 나온 ‘말띠’ 시리즈는 꽤나 재미있는 기획임에 틀림없다.
뼈를 깎는 경쟁은 발전을 불러온다.
‘말띠 여대생’이 그것을 입증한다.
(35) 공미도리(孔美都里)
1963년 한·일 친선 패션쇼 관계로 서울을 방문한 일본 패션모델들과 함께한 재일동포 여배우 공미도리(맨 오른쪽). 신성일과 혼담이 오갔던 상대였다. [중앙포토]
청춘스타로 주가를 떨칠 무렵 맞선 상대가 나타났다.
재일동포 여배우 공미도리(孔美都里)다.
1963년 여름, 나는 몸이 두 서너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이 때 일본인 여인과 한국인 남자의 사랑을 다룬 ‘현해탄의 구름다리’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공미도리가 여주인공을 맡았다.
‘현해탄의 구름다리’는 한운사 작가의 라디오 드라마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가 원작이다.
원작 드라마는 크게 히트했다.
일본으로 끌려간 학도병 아로운이 얼마나 사랑을 받았던지….
아로운을 괴롭히는 악질 일본헌병 역의 이예춘(이덕화 아버지)을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아로운 역의 김운하는 내 또래의 라이벌 배우였지만 나약한 이미지를 벗지 못해 영화배우로 대성하진 못했다.
공미도리는 아로운을 동정하는 여인 히데코 역으로 나왔다.
작가 한운사(左), 배우 이예춘(右)
한국예술영화사가 공미도리를 두고 기획한 작품이 ‘현해탄의 구름다리’였다.
촬영은 내 스케줄에 맞춰 이뤄졌다.
초반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촬영을 했다.
공미도리는 우리 말도 서툰 데다 촬영 날을 빼면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그 때 말상대가 된 사람이 일본말에 능통한 내 어머니였다.
공미도리는 촬영이 없는 날이면 우리 집에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어머니는 혜화동 여인 사건 이후 내 주변을 감시했지만 그녀만큼은 마음에 들어 했다.
명동 메트로호텔에 묶고 있던 공미도리는 아주 곱고, 교육을 잘 받은 처녀였다.
항시 눈에 웃음이 번졌고, 말이 별로 없었다. 집안도 좋았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중의원을 지낸 부잣집 딸이었다.
‘현해탄의 구름다리’ 촬영이 끝난 후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메트로호텔로 공미도리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나 모르게 양가 부모님 사이에 혼담이 오간 것이었다.
맞선인 셈이었다.
일본에서도 영향력을 막강했던 공미도리 부모는 멋쟁이였다.
나를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나온 옷차림이었다.
일본에서도 영화배우는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 번 공미도리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분들은 결혼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꺼냈다.
“이곳(한국) 말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게 어떤가. 뒷바라지는 우리가 하겠네.”
공미도리와의 혼담은 즐거운 일이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모든 여건이 좋았다.
게다가 쟁쟁한 재일동포 집안에서 사윗감으로 생각해주었으니….
그러나 64년 당시 내 가슴에는 엄앵란이 들어와 있었다.
나와 엄앵란의 관계를 잘 모르던 극동흥업 차태진 사장은 우리 둘을 조선호텔로 불러내 이렇게 말했다.
“앵란이는 김기덕 감독과 결혼하고, 너(신성일)는 공미도리와 결혼해라.”
차 사장에겐 김 감독과 나, 그리고 엄앵란이 모두 중요한 존재였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보면 이런 커플을 형성하는게 극동흥업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 엄앵란과 결혼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공미도리는 공화당 시절 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동생과 결혼했다.
엄앵란이 없었다면 공미도리와의 혼담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공미도리보다 엄앵란과의 인연이 더 강했던 것이다.
(36) 두수와 요안나
영화 ‘맨발의 청춘’(1964). 승마 복장의 요안나가 두수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애원하는 장면이다.
시간이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한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모든 일은 절박한 상황에서 이뤄진다.
‘맨발의 청춘’(1964)은 장고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었다.
촬영 기간은 불과 18일.
일정이 매우 촉박했지만 보기 드문 흥행작이 됐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첫 장면부터 짙은 페이소스가 풍기는 가수 최희준의 저음은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시대의 감성에 호소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탁월함이 있었다.지금도 뒷골목 청년 두수(신성일)와 천사 같은 상류층 딸 요안나(엄앵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일정이 빠듯하다 보니 촬영은 변칙적으로 진행됐다.
편집을 잘 하는 김기덕 감독은 촬영 중반부턴 아예 녹음실에 틀어박혔다.
현장에서 찍어서 녹음실로 보내면 녹음실에서 편집해가며 녹음을 했다.
조감독 고영남과 나·엄앵란 셋이 현장을 만들다시피 했다.
나와 엄앵란·트위스트 김은 상황마다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여러 명의 위트·열정· 패기가 감각적인 액션을 만들어냈다.
난 그때 엄앵란의 순발력에 놀랐다.
액션에 관한 한, 내가 현장감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울분에 찬 두수가 휘두르는 주먹에 아우 아가리(트위스트 김)가 맞아 쓰러지는 장면은 어떠했나.
나는 영화출연이 처음인 트위스트 김에게 쓰러지는 동작을 세밀하게 가르쳤다.
“오른손이야. 고개 왼쪽으로 돌아!”
동시녹음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 장면부터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발을 테이블에 걸치고 찻잔은 무릎 위에 얹은 반항적인 두수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나는 완전히 힘을 빼고 연기를 했다.
배우들이 판에 박은 연기를 하도록 지시하는 유현목·김기영 감독의 영화 같았으면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배우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지론을 가진 신상옥 감독 밑에서 연기 생활을 시작한 것이 나로선 행운이었다.
액션에 능한 나는 이미 카메라 앵글을 꿰뚫고 있었고, 청춘영화에서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감독들이 나를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유일한 배우로 성장해갔다.
‘두수’라는 주인공 이름도 내가 지었다.
차태진 극동흥업 사장과 김 감독은 주인공 이름을 짓지 못해 고심했다.
두수의 모델은 당시 김두수 우석대 재단이사장이었다.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멋쟁이로 여겼던, 이탈리아 배우 안소니 퀸과 닮은 분이었다.
갑자기 김두수씨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형, ‘맨발의 청춘’에 형 이름 써도 괜찮아?”
“나야 좋지.”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두수는 아무리 봐도 뒷골목 이름으로 어울렸다.
‘요안나’란 이름은 세례명이다.
때 묻지 않은 고귀한 이름으로 뒷골목 사나이 두수와의 신분 격차를 벌리는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방앗간에서 손을 꼭 잡고 자살했을 때 감동이 커졌다.
트위스트 김이 눈길 위에서 울면서 두수의 시신을 실은 리어카를 끄는 엔딩 장면에도 재미난 사연이 숨어있다.
촬영팀은 눈을 찾아 대관령으로 떠났다.
거적에 덮인 발만 찍는 데 내가 갈 필요는 없었다.
카메라에 잡힌 두수의 맨발은 제2 조감독의 발이었다.
(37) 25시(時)
‘맨발의 청춘’(1964)에서 신성일이 면도하는 장면. 잘 발달한 삼각근이 돋보인다. 왼쪽은 트위스트 김. 신성일은 이 영화가 성공하면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뛰어다니게 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청춘영화 세례를 받은 관객들은 영화 ‘맨발의 청춘’에 열광했다.
영화의 시스템도 달라졌다.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전무가 아카데미극장을 맡았을 때 극장이 지고 있는 빚만 1억원이었다.
1964년에 1억원은 엄청난 돈이었다.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2008년 펴낸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맨발의 청춘’이 히트해서 1억원을 갚았다.
신성일·엄앵란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썼다.
아카데미극장은 이후로도 나와 엄앵란의 영화를 계속 상영해 굉장한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평론가들은 ‘맨발의 청춘’이 대한민국에 스타시스템을 탄생시킨 작품이라고 평한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 전까진 배우의 이름을 내걸어 흥행몰이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맨발의 청춘’을 계기로 나와 엄앵란은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영화 제작사들은 나와 엄앵란을 출연시키느냐, 못하느냐에 사활을 걸었다.
스타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당시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지방업자와 극장주였다.
필름이 매우 귀한 시대였다.
서울의 극장 하나, 부산·광주 등 지방 5개 권역의 각 업자가 많아야 10개 미만의 필름을 입도선매했다.
지방업자들이 필름을 미리 사가는 기준은 몇 가지가 있었다.
나와 엄앵란의 출연 여부, 시나리오, 제목 등이었다.
제작사 측은 지방업자들의 입맛에 맞춰 작품을 만들었다.
서울에도 영화 필름(20분 단위 5~6개 롤)은 하나밖에 없었다.
반면 나와 엄앵란이 나오는 작품을 걸고 싶어하는 극장은 많았다.
서울 중심가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면 오토바이가 필름 한 롤을 들고 영등포 등 다른 지역 극장으로 달렸다.
20~30분 간격으로 상영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극장을 돌다 보니 사고도 많이 났다.
필름이 도착하지 않아 상영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다.
제작자는 지방업자와 극장주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제작비를 자체 충당할 수 있는 영화사는 거의 없었고, 지방업자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한양영화사에서 일하던 신봉승 작가에 따르면 ‘맨발에 청춘’ 이후 군소제작사들은 죄다 ‘청춘’이 들어가는 영화에 달려들었다.
작은 제작사일수록 나와 엄앵란이 더욱 필요했다.
거기 가담한 사람이 명동에서 동양양복점을 운영하던 이종벽 사장이었다.
이 사장은 동양영화사를 설립해 나와 엄앵란 주연의 영화를 제법 많이 만들었다.
할리우드는 스타 시스템의 원조였다.
클라크 게이블·비비안 리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로버트 테일러·데보라 카 주연의 ‘쿼바디스’(1951),
제임스 딘·나탈리 우드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1955), 워렌 비티·나탈리 우드 주연의 ‘초원의 빛’(1961) 등은 스타를 전면에 앞세운 영화였다.
이와 달리 보수적 경향이 강한 유럽은 철저한 프로듀서 시스템이었다.
1년 제작 편수는 약 150편. 관객층이 완전히 변했다.
그 전까진 ‘고무신 관객’이라 불린 중년여성을 겨냥한 멜로영화가 대세였지만 그 자리를 청춘영화가 차지하게 됐다.
나는 잠잘 시간이 없었다.
24시로는 부족했다.
24시를 4등분해 한 작품에 6시간씩 할당하는 스케줄로 살았다.
새벽이면 차에서, 라이온스호텔 사우나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25시(時)의 삶. 하지만 그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다.
(38) 이봉조와 현미
1972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연예인축구대회에 참가한 신성일(왼쪽)이 이봉조와 함께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중앙포토]
가까이 지내면서도 안타깝게 여기는 커플이 있다. 작곡가 이봉조(1931~87)와 가수 현미(73)다.
‘맨발의 청춘’(1964)에서 그들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봉조는 최희준이 부른 ‘맨발의 청춘’ 주제가를 작곡하며 입지를 굳혔다.
이어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최희준의 ‘종점’, 정훈희의 ‘안개’ 등 주옥 같은 곡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내가 본 이봉조는 천재였다.
작곡가들은 즉흥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맨발의 청춘’이 그랬다.
촬영 기간이 18일이었지만 작곡할 시간은 더욱 짧았다.
미8군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약했던 그는 촬영 화면을 보고 녹음실에서 색소폰으로 몇 번 ‘빠앙빠앙’ 불다가 주제곡을 완성했다.
이봉조는 다재다능했다.
한양대 건축과 출신으로 6인조 밴드를 조직해 활동했고, 서예의 달인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신정 때 친필로 써 보낸 그의 카드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현미가 수없이 밝힌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미8군 공연을 하며 만났다.
이봉조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현미가 임신 7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이봉조는 현미 모르게 두 집 살림을 했다.
가수 현미
1972년 오일쇼크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어느 날이었다.
손에 큰 가방 하나 든 현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동부이촌동 삼익APT)에 찾아왔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작은 아이는 4학년이지 않았나 싶다.
사연은 이랬다. 이봉조는 현미를 입적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그 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본처와 헤어지겠다는 말도 지키지 않았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린 현미에게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이봉조의 본처가 아기를 낳았다.
그 소식을 접한 현미는 바로 두 아이를 데리고 창경궁 부근의 원남동 집에서 나왔다.
살 곳도 없으니 큰 일이었다.
현미의 아들 영근이가 우량아여서 우리는 현미를 ‘돼지 엄마’라고 불렀다.
우린 그 정도로 친했다.
엄앵란은 현미가 가련해서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침 동부이촌동 삼익(렉스) APT가 분양 중이었다.
우리는 은행 대출을 받아 아파트 값을 마련해줬다.
순전히 엄앵란의 신용대출이었다.
지금도 현미가 방송에서 엄앵란에게 신세 졌다고 하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나는 평소 이봉조가 진주 출신의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미와 자식들을 못 본 채 하는 그의 처신은 사나이답지 못했다.
자신의 말대로 본처와 헤어지던가, 아니면 현미와 아이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아무리 형이라고 불렀지만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어느 모임에서 이봉조와 마주쳤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봉조를 노려봤다.
“형, 왜 그렇게 책임을 못져? 동생한테 맞아봐야 정신차리겠어!”
그가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봉조는 그 사건 후 나만 보면 피해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인 87년 8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 역시 현미에게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남자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지금도 가방 하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그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39) 이대엽 사건
이대엽(오른쪽)과 조미령이 주연한 영화 ‘경상도 사나이’(1960). 이대엽은 이 영화를 통해 영남지역에서 최고 인기를 얻었다. 이후 ‘욕망의 결산’(1964)에서 신성일을 만났다. [중앙포토]
1964년 2월 ‘맨발의 청춘’이 개봉했을 즈음이다.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촬영한 작품이 ‘욕망의 결산’이었다.
갓 데뷔한 임권택 감독, 나와 이대엽·김혜정이 호흡을 맞춘 ‘욕망의 결산’의 배경은 부산 부둣가 뒷골목이었다.
‘맨발의 청춘’류 영화였다.
내가 이대엽 조직의 부하, 김혜정이 이대엽의 여동생 역을 맡았다.
태종대에서 나와 김혜정이 데이트 하는 장면이 백미였다.
촬영팀은 광복동 파출소 뒤편 30m 거리에 있는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광복동에 호텔이 있었지만 값이 비쌌다.
국제시장과 극장 3곳(제일극장·부산극장·부림극장)이 있던 광복동 거리는 부산에서도 가장 번화했다.
광복동에서 태종대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부산항 제3부두에서 똑딱선을 타고 태종대로 들어가야 했다.
첫날은 제3부두 촬영이었다.
임권택 감독
해가 떨어지자마자 촬영이 끝났다.
세 살 위 선배이자 공군 출신인 이대엽이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성일아, 술 한 잔 하자!”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부산 시내 술집을 구경했다.
이대엽은 나를 부산진역 앞으로 데려갔다.
그곳 술집은 주로 외항선 마도로스들을 상대했다.
1960년대에는 귀했던 맥주와 양주들이 넘쳐났다.
이대엽이 그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곳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종업원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대엽이 전부터 잘 아는 집인 것 같았다.
“대엽 오빠, 오빠.”
보통 인기가 아니었다.
당시 경상도에서 이대엽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법했다.
60년 출연한 영화 ‘경상도 사나이’ 주인공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가 됐다고 하지만 그곳에선 이대엽에 비할 바 아니었다.
이대엽이 나를 소개했다.
“내 뒤에 신성일 왔다!”
더 난리가 났다.
우리는 술집 주인과 아가씨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해 2층으로 올라갔다.
조니워커 같은 고급술이 들어왔던 것 같다.
남자는 나와 이대엽뿐인데, 여자는 8명 정도였다.
선배 박노식에게 발길로 얼굴을 얻어맞고 ‘술은 저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 넣었던 나였지만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부산 지리에 완전히 어두웠던 데다 이대엽이 마주앉아 나를 꽉 누르고 있었다.
독한 양주 탓에 나는 완전히 인사불성이 됐다.
얼만큼 마신지 몰랐다. 아침에 눈을 떴다.
창을 걷어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촬영을 위해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 몸을 살펴보았다. 옷은 다 입고 있었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엽도 보이지 않았다. 옆 방에 가 보니 그가 잠에 취해 있었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대엽이형, 일어나!”
상황을 파악한 이대엽도 “큰일났다”며 뛰어나왔다.
현장에선 이미 난리가 났다.
주연배우 두 명이 행방불명 됐으니….
범아영화사 제작부장은 사색이 됐다.
그때 제작사와 임권택 감독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제3부두에서 똑딱선을 타고 태종대 부두에 도착해 로프를 잡고 올라서는데 몸이 으슬으슬했다.
끔찍한 사건의 전조였다.
(40) 태종대의 비극
영화 ‘맨발의 청춘’(1964)에서 요안나가 뒷골목 청년 두수의 다친 손을 치료해주고 있다. 신성일은 ‘맨발의 청춘’에 이어 ‘욕망의 결산’에 출연했다가 태종대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중앙포토]
발 한 번 삐끗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다.
부산 술집을 빠져 나와 태종대에 닿았을 무렵,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술도 덜 깬 데다 날씨도 추웠다.
‘욕망의 결산’ 상대역인 김혜정이 촬영 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김혜정이 태종대 바위 위에서 나란히 걷는 장면이었다.
뒷골목 건달 역이었기에 파일럿 점퍼에 손을 넣은 채로 카메라 테스트에 임했다.
이게 웬일! 태종대 바위는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발을 헛디뎠다. 점퍼에 넣은 손을 빼낼 겨를이 없었다.
넘어지면서 얼굴이 그대로 바위에 찍히고 말았다.
선글라스는 깨졌고, 얼굴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누군가 수건으로 내 얼굴을 감쌌고, 바로 그 길로 똑딱선 타고 부산항으로 갔다.
도착해 보니 부산 광복동 해돋이병원이었다.
왼쪽 눈 바로 위쪽 미간이 찢어졌다.
선글라스 조각이 그 사이로 파고든 상태였다.
코도 주저앉았다.
김혜정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의사에게 애원했다.
“선생님, 선성일씨는 큰 인물이 될 사람입니다. 치료 잘 해 주세요.”
눈 감고 누워있어 그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김혜정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수술은 두 시간 이상 걸렸다.
‘이제 영화배우 생활 끝났구나. 내 팔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한 번의 실수로 배우 생활이 끝난 것 같았다.
그런 내 자신이 한심했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흉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가장 가는 6호실로 꿰맸다. 그러나 코는 내가 만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얼굴이 붓기 시작하면서 눈을 뜰 수 없었다.
곧바로 열차에 실려 서울로 왔다.
임권택 감독과 제작자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내 얼굴을 본 어머니는 통곡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어머니께선 내게 거울을 보지 말라고 하셨다.
주저앉은 코도 빨리 세워야 했다.
어머니가 수소문한 곳은 종로 1가의 노이비인후과였다.
나이 지긋한 의사는 노란 고무줄을 씌운 쇠꼬챙이를 코 속에 밀어 넣은 다음 다른 손으로 어긋난 코뼈를 맞추었다.
코에서 ‘두둑’ 소리가 나면서 막혀 있던 피가 확 쏟아졌다.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얼굴이 좀 돌아왔다.
병원에 다시 가니 의사가 손으로 코를 만져주었다.
그때 기술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지금도 내 코는 약간 비뚤어져 있고, 코를 잘못 풀면 피가 섞여 나온다.
건강해서 그런지 회복이 빨랐다.
사건 발생 2주 만에 붕대를 풀고 바깥으로 나갓다.
영화잡지 ‘영화세계’의 시상식장이었다.
신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욕망의 결산’ 촬영을 재개했다.
아쉽게도 흥행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태종대 사고’는 내가 기본을 지키지 않아서 일어났다.
배우에게 손 처리는 연기의 기본이다.
손을 못 넣게 하려고 바지주머니를 꿰맨 채 연기공부를 하던 나였다.
춥다고, 폼 잡는다고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지금은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끼고 다닌다.
바지주머니에 절대 손을 넣지 않는다.
내 눈 위의 상처 자국은 그때의 교훈을 웅변한다.
영화계에서 쉬쉬해서 조용히 지나갔지만 말이다.
- 계속 -
編輯 ... 張河多 多張印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