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맨발이다 - 인생은 맨발 마라톤…도전하라
(21) 눈물의 결단
1960년대 한국 영화산업을 이끌었던 신상옥 감독. 그가 세운 신필름은 제작 시스템, 장비와 시설, 전속 제도 등 모든 면에서 할리우드 시스템에 근접한 영화사였다. [중앙포토]
모든 일은 내가 저지르고, 해결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뒤의 결연함. 그런 마음으로 극동흥업의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할 기회를 잡고자 했다.
영화사 측은 최종 결정을 재촉하는데, 막상 카드를 쥔 신상옥 감독은 홍콩 출장 중이었다.
운명의 날 오전. 신필름 사무실에는 황남 전무만 있었다.
황 전무는 이광수 원작의 영화 ‘꿈’에서 최은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 있는 연기자 출신이다.
신 감독과는 친구 사이였고, 신필름의 실질적인 ‘넘버 투’였다.
떠나는 마당에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다.
그가 곱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 각오한 채 말을 꺼냈다.
1962년 여름, 계약상으론 나는 확실히 자유의 몸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 감독님이 안 계셔서 그렇습니다.
극동흥업에서 책(대본)이 하나 들어왔는데 출연하고 싶습니다.”
그는 눈을 치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임마, 여기(신필름) 전속배우가 함부로 나가려 해? 나가면 배신이야!”
“계약이 끝난 것 같습니다.”
“뭐, 임마? 미스 한, 계약서 찾아와.”
황 전무가 골리앗이라면 나는 다윗에 불과했다.
회계 담당 미스 한이 계약서를 가져왔다.
내용을 확인한 황 전무가 계약서를 집어 던졌다.
“신 감독 올 때까지 기다려!”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 배신자 같은 놈”이란 소리와 함께 눈에서 불꽃이 번쩍 했다.
황 전무가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나 같은 녀석은 안중에도 없었다.
몸을 돌려 문을 나서는 순간, 신필름과 인연은 끝이 났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신 감독에게 매달려서라도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해야 했다.
신 감독과 만났더라도 아마, 허락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 감독이 이후 청춘영화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면 내게 다른 제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훗날 신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보아도 그런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필름은 내게 고향, 그 자체였다.
그 곳에서 전속배우로 3년간 월급을 받으며 지낸 건 행운이었다.
충무로에서 전속배우를 둘 정도로 자리 잡힌 회사는 신필름밖에 없었다.
신필름은 스튜디오를 두고, 동시녹음이 가능한 독일제 미첼 카메라를 갖추고, 스태프가 타고 다니는 전용버스를 운영하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섰다.
신필름에는 미첼 카메라 한 대와 아리후렉스(Arriflex) 카메라 세 대가 있었다.
내가 굶지 않고, 일류 작가 및 기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신필름 덕분이었다.
“넌 배신자야”라는 황 전무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이지 어떤 울음보다 더 큰 통곡이었다.
나를 키워준 신필름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힌 채 떠나는 아픔이란….
신필름이 있던 을지로 3가 을지극장 앞 명성빌딩에서부터 극동흥업이 자리한 충무로 중부경찰서 앞까지 울면서 걸었다.
100m가 채 못 되는 거리였다.
눈물이 비 오듯 흘렀지만 닦지 않았다.
남들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중부경찰서 앞에 오니 정신이 번쩍 났다.
뒷골목에서 눈물을 닦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극동흥업에 들어갈 순 없지 않은가.
마음을 단단히 하고 2층짜리 극동흥업 건물로 걸어 올라갔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22) JP와의 바둑대결
JP(김종필)와 신성일은 1970년대 초 바둑친구였다. 사진은 2001년 4월 대전에서 열린 제2회 운정배 바둑대회에서 훈수를 하고 있는 JP. [중앙포토]
최근 JP(김종필)가 5·16 반세기를 맞아 언론에 당시 이야기를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중앙일보에서 JP의 모습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1960년대부터 교분을 맺어왔지만 가택연금 시절의 JP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60년대 청춘스타로 떠오른 나는 정부 공식 행사에서 청와대 실력자와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혔다.
게다가 연예계 부동의 납세 1위였기에 이들의 관리 대상이기도 했다.
그 중에 가족 같은 친분으로 JP의 집에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됐다.
청구동(현 신당동) 자택에 가면 김진봉 수석비서관을 비롯해 5~6명이 JP를 보필했다.
백색전화기만 5~6대가 비치돼 있었다.
5·16을 기획·주도한 JP는 70년 전후로 3선 개헌 및 유신헌법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 서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박정희는 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JP는 3선 개헌을 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정희를 견제한 국민들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김용태·양순직 의원, 쌍용그룹 김성곤 창업주 등도 JP와 뜻을 같이했던 인물이다.
서울신문사 사장 출신으로 6·7대 공화당 국회의원이 된 양 의원의 경우, 69년 3선 개헌 반대를 주도하며 당에서 제명됐다.
김성곤 창업주의 트레이드 마크는 콧수염이었는데, 그가 남산에 끌려가 콧수염이 뽑혔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서슬 퍼런 시대였다.
71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JP는 청구동 자택에 가택 연금된 상태였다.
나는 빨강 무스탕을 몰고 청구동을 방문하곤 했다.
JP의 집에 가까이 가면 검정 양복을 입은 기관원이 길 입구에, 또 다른 사람이 집 앞 모퉁이 건너에 서 있었다.
집 앞 도로는 좁은 일방통행로였는데, 지나가는 차가 있을 턱이 없었다.
마음 편하게 무스탕을 집 앞에 대고 내렸다.
일거수일투족이 속속들이 윗선에 보고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박 정권이나 JP와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관원들에게 손으로 아는 체 하면, 그 쪽에선 목례로 화답했다.
벨을 누르면 김진봉 수석비서관이 문을 열어주었다.
절차는 아주 간편했다.
당시 연금된 JP와 부인 박영옥(박정희의 질녀) 여사를 감히 찾아갈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까만 양복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을 보면 자동차 핸들을 꺾을 수밖에 없다.
JP는 나를 ‘미스터 신’이라고 불렀고, 나는 깍듯하게 ‘총리님’이라고 호칭했다.
응접실에는 항상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우리의 바둑대결은 아주 특이했다.
JP는 나를 보면 “바둑이나 두지”라며 아무 말없이 바둑판 앞에 앉았다.
제3자가 보았다면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JP는 가만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뻔히 다 아는데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 역시 JP에게 아쉬운 게 전혀 없었다.
너무 외롭게 사시니 인사차 간 것뿐이었다.
나 외에 방송작가인 김석야·조남사가 바둑을 두며 이심전심하는 JP의 객(客)이었다.
내 바둑 실력은 11급, JP는 8급이었다.
두 점 접바둑을 두고도 JP에게 늘 졌다.
JP와의 바둑대결은 푸근한 맛이 있었다.
JP라는 인물의 성격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JP의 진면목을 발견한 건 몇 년 후였다.
(23) ‘예능인’ JP
1986년 3월 구 여권인사들의 오찬 모임에 참석한 JP(오른쪽)가 이후락과 6년 만에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두 달 후 골프장에서 서로 불편했던 관계를 정리했다. [중앙포토]
5·16을 주도한 JP에 대해 나만 알고 있는 비밀 하나가 있다.
그의 진면목을 살펴보는 단초라고 생각한다.
1974년 ‘별들의 고향’이 대단한 화제를 모았을 무렵이다.
영화 촬영을 끝내고 한남동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약수동에서 JP의 벤츠를 발견했다.
청구동(현 신당동) 자택에서 장충동으로 나가는 길이지 않았나 한다.
JP는 뜻밖에 혼자서 차를 몰고 있었다.
호젓한 드라이브! 나 역시 시간만 있으면 드라이브를 즐겼기에 그런 심리를 잘 알았다.
JP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방향이 달라 그만두었다.
그때 용기를 냈더라면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했으련만….
JP는 군인 출신이지만 로맨티스트였다.
젊은 시절 잘 생겼고, 두뇌 회전이 빨랐기에 내가 아는 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일요화가회의 중심이었다.
실제로 수채화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유채화는 시간이 많이 걸려 잘 시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만돌린을 켤 줄 알았고, 외국 대사를 불러 문화행사도 열었다.
소띠인 JP는 소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언젠가 JP와 나, JP 사위였던 이동보, 그의 친구인 영화배우 신영일이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다.
JP의 부인 박영옥 여사가 재미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소 네 마리가 앉아서 밥을 먹네.”
우리는 그 말에 껄껄 웃었다.
JP가 25년, 내가 37년, 이동보와 신영일이 49년 소띠였던 것이다.
JP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들 소띠로구먼. 소띠는 일을 많이 하는 팔자야.”
공화당의 심볼이 황소다.
공화당을 만든 인물이 JP인 걸 감안하면 JP의 아이디어일 가능성이 크다.
확인되지 않은 나의 추측이다.
JP는 골프 실력도 대단했다.
핸디가 8~9(싱글)로 아마추어 치곤 수준급이었다.
허리 디스크로 풀스윙은 못하지만 어프로치와 퍼팅이 정확했다.
서너 번 게임을 했는데 통틀어 내가 한 타를 뒤졌다.
JP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화해한 골프 회동(안양컨트리클럽)도 잊을 수 없다.
86년 5월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공화당 조직은 급격히 화해됐다.
신군부는 공화당 출신을 부정축재 등의 명목으로 잡아들였다.
이후락은 그 과정에서 “나는 콩고물밖에 못 먹었다”고 말했다.
이후락의 ‘콩고물 발언’은 JP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박 대통령의 측근이던 두 사람은 등을 돌렸다.
그런 두 사람이 그 후 처음으로 골프를 친 자리였다.
“두 분이 같이 앉아 계시니 저로선 뵙기도 좋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이후락은 머리가 하얗고, 성격이 급해 말을 더듬곤 했다.
그가 내 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내, 내가 악역 했잖아.”
JP 때문에 자신이 언론에 두들겨 맞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굉장히 인간미 넘치는 말로 들렸다.
최근 JP가 5·16 관련 인터뷰를 하며 “박통을 위해 내가 악역 했잖아”라고 한 것은, 내가 알기로 이후락의 ‘악역론’ 변주였다.
등을 돌려던 두 사람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통하고 있던 것이다.
JP 인터뷰를 읽으며 나는 삶의 향기에 젖어 들었다.
JP와 박 여사, 내내 건강하십시오.
(24) 나의 모델, 앤서니 퍼킨스
신성일이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의 모델로 삼은 할리우드 영화 ‘굿바이 어게인’. 1962년 국내 상영됐다. 사진 오른쪽부터 잉그리트 버그만·앤서니 퍼킨스·이브 몽땅. [중앙포토]
최고가 되려면 최고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젊은 시절 내가 실천한 성공 전략이었다.
눈물을 닦고 극동흥업에 들어갔더니 호현찬 기자와 차태진 극동흥업 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를 기획한 호 기자가 신필름에서 벌어진 일을 물었다.
“다 끝냈습니다. 법적으로 문제 없습니다.”
차 사장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 없이 책(대본)과 5만원을 주었다.
5만원은 신필름에서 내가 받던 열 달치 월급.
이 돈이 계약금인지 아닌지는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촬영 중간에 5만원을 더 받았으니 출연료가 10만원인 셈이었다.
어찌됐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촬영은 일주일 후에 들어가기로 했다.
5만원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하숙집에 들어앉아 대본을 분석하기엔 성이 차지 않았다.
그 길로 대구 최고의 부자인 선학알미늄의 사장 자제들이 서울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남산 KBS 1TV(현 남산애니메이션센터) 부근의 단독주택으로 향했다.
그 집엔 딸 둘과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집 형제들과 특별히 친했다.
다짜고짜 “2층 방 하나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 집 형제들은 왜냐고 물었다.
‘아낌없이 주련다’ 시나리오 완성도에 대한 나의 확신은 변함 없었다.
“이번에 책을 받았는데 출연하면 정말 성공할 것 같아. 딱 일주일이면 된다.”
그 집에 틀어박혀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누군가를 연기 모델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펴 보니 광화문 쪽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원작의 영화 ‘굿바이 어게인’이 상영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어 제목 ‘이수(離愁)’로 간판이 걸렸다.
앤서니 퍼킨스·잉그리트 버그만·이브 몽땅이 주연한, 연상 여인과 연하남 사이의 맺어질 수 없는 절실한 사랑 이야기였다.
‘아낌없이 주련다’와 느낌이 비슷했다.
대본을 읽는 일주일 동안 ‘굿바이 어게인’을 7번 보았다.
남자 주인공인 퍼킨스는 여성적 느낌이 넘치는 섬세한 멜로 연기에 뛰어난 당대 최고의 배우였다.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퍼킨스만한 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할리우드 남자 배우들의 장점도 분석해보았다.
‘에덴의 동쪽’(1955) 제임스 딘은 반항적 연기가 일품이었고, 말론 브란도는 중량감 있는 하드보일드 영화에 어울렸다.
‘상처뿐인 영광’(1956)의 폴 뉴먼은 캐릭터를 풍부하게 표현하는 데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
나는 퍼킨스와 일심동체가 됐다.
퍼킨스의 손 동작과 눈 움직임을 보며 나를 대입해 보았다.
또 퍼킨스의 연기를 생각하며 대본에 동작을 다 적어놓았다.
대본을 100번도 더 읽었다.
전체 108신(러닝타임 105분)을 외어버렸다.
‘아낌없이 주련다’ 촬영은 서울 서라벌예대 바로 위의 미아리 세트장에서 시작됐다.
여주인공 이 여사(이민자)가 경영하고, 피난 온 대학생 하지송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레스토랑 내부에서 주로 찍었다.
유현목 감독은 가장 중요한 장면부터 카메라를 들이댔다.
9살 꼬마 안성기는 이 여사의 아들 역으로 출연했다.
레스토랑 신은 작품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는데, 사흘 동안 밤을 새워가며 촬영했다.
퍼킨스를 모델로 삼은 나의 힘과 열정은 폼페이를 집어삼킨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했다.
(25) 아찔한 유혹
부산 다대포에서 촬영한 ‘아낌없이 주련다’의 러브신. 신성일과 이민자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영화배우로서 철칙이 있다.
아내 엄앵란 외에 어떤 여배우와도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는 소신을 평생 지켜왔다.
스캔들로 몰락한 선·후배를 숱하게 봤기 때문이다.
1962년 여름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주련다’를 촬영했다.
서울 세트(레스토랑 신) 촬영 직후 ‘러시(rush) 필름’(편집 전 필름) 시사회가 종로 단성사에서 열렸다.
조명기사·촬영기사·감독·스태프·출연자·제작자들만 보고 에러를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장·단점이 그대로 노출되기에 웬만한 배짱으론, 특히 나 같은 신인배우가 낄 수 없는 자리였다.
어떤 평가가 나올지 몰라 불안감이 커졌다.
점심 무렵, 차태진 극동흥업 사장이 시사회에서 돌아오자마자 날 불렀다.
보자마자 내 등허리를 탁 치고 “성일아, 잘 했어” 하면서 5만원을 주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날 거들떠 보지도 않던 스태프들 얼굴에서도 나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틀 후 부산 다대포 촬영이 예정돼 있었다.
가회동 하숙집까지 걸어가면서 ‘이 작품은 생각 이상으로 성공하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낌없이 주련다’의 해변 러브신은 부산 송도와 다대포에서 촬영했다.
버터 랭커스터·데보라 카 주연의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에 필적할 만큼 아름답다는 평을 받았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는 진주만에 근무하는 상사와 부대장 부인과의 사랑 이야기다.
하와이 해변의 러브신이 백미였는데,
부산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여인과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사랑을 다룬 ‘아낌없이 주련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내 상대역은 ‘한국의 에바 가드너’라 불린 이민자였다.
쌍꺼풀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그녀는 당시 30대 중반으로 여인으로서의 농익은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영화배우 김진규와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배우로서의 감정표현도 풍부했다.
이민자를 보면 그 큰 눈 속에 빠져들 것 같았다.
그녀의 두툼한 입술은 남자의 입술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
풍만한 몸매이면서도 허리와 다리는 날씬했다.
또 남자를 완전히 매혹시키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매력은 약 10살 아래인 나를 만나면서 스크린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 때 내 나이 25살.
나와 이민자는 송도에 있는 여관 겸 음식점 2층에 따로 숙소를 배정받았다.
2층에 나와 이민자 사이에는 미닫이 문 하나밖에 없었다.
촬영이 끝나면 이민자는 나를 불렀다.
“미스터 신, 안마 좀 해줘요.”
대선배의 요구였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안마를 하다 보니 아찔했다.
은근한 유혹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민자가 살며시 잠드는 기색이 보이면 나는 1층으로 내려가 맹인 안마사를 불러왔다.
그러면 그녀는 세상 모르고 잤고, 그 과정은 2박3일로 끝났다.
나는 ‘톱스타가 돼야 한다.
여기서 자제 못하면 내 자신에게 진다’며 유혹을 느낄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지금도 그 때를 돌아보면 백 번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혹은 한 순간이다.
만약 그때 무너졌다면, 한때 반짝하고 잊혀진 배우들처럼 지금의 신성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26) 오토바이 사고
신성일의 출세작이 된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1962)의 한 장면. 이민자(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신성일(맨 오른쪽).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기회를 한번 움켜잡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부산에서 ‘아낌없이 주련다’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김수용 감독의 청춘영화 ‘사춘기여 안녕’ 주연 제안이 들어왔다.
이민자와 불꽃 로맨스를 연기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코미디 영화의 대가였던 김 감독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청년 역으로 나를 캐스팅했다.
나는 의정부에서 일주일 동안 250㏄ 야마하 오토바이를 타며 촬영에 대비했다.
돌이켜보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아낌없이 주련다’를 찍으며 한 단계 도약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도 장면을 바꾸고 하지만 유현목 감독은 그런 일이 없었다.
‘오발탄’에서 사실주의 영화의 정점을 보여준 그는 현장에 시나리오 수정본을 갖고 오는 완벽함을 추구했다.
더는 고칠 게 없도록 말이다.
또 한 치의 오차 없이 배우를 움직이게 했다.
배우들은 진을 뺄 정도로 리허설을 많이 해야 했다.
이런 유 감독을 견뎌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사춘기여 안녕’ 촬영 중 불의의 사고가 벌어졌다.
원남동 로타리에서 돈화문 입구까지 촬영이 있던 날이었다.
카메라가 일반 영업용 차량 뒷트렁크에 탄 채, 뒤따르는 나를 촬영했다.
촬영장비가 열악했던 때였다.
감독은 조수석에 탔고, 촬영조수가 카메라 옆에서 피사체의 거리를 맞춰 조정했다.
요즘은 200㎜ 망원렌즈로 25m 떨어진 거리에서도 당겨 찍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45㎜ 스탠더드 렌즈로 찍었다.
배우가 3m 거리에서 바싹 따라붙어야 했다.
너무 느리게 가면 맥 빠지는 화면이 나왔다.
외국에선 스크린 프로세스(Screen Process)란 기법으로 이런 장면을 소화했다.
배우는 차나 오토바이에 가만히 앉아있고, 미리 찍어놓은 배경과 합성하는 방식이다.
‘로마의 휴일’(1953) 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야 스크린 프로세스를 활용했다.
영화 ‘길소뜸’이 KBS 이산가족 찾기 필름을 배경으로 써서 김지미와 합성한 게 좋은 예다.
돈화문 부근에서 촬영차가 신호등에 걸리며 갑자기 서버렸다.
오른쪽에 구경꾼 차량이 따라붙고 있어 나는 오토바이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오토바이는 중앙분리선을 넘어가 맞은편 차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내 몸은 공중으로 붕 떠 주유소 스탠드에 박혀버렸다.
오른쪽 다리가 뻐근해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었지만 오른쪽 바지가 다 찢어졌다.
오른손 밑이 까지고, 오른쪽 다리는 피투성이가 됐다.
땅을 짚고 일어나보니 피로 덮인 오른손에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살점이 푹 파이고, 약 10㎝가량 찢어졌다.
의사는 마취하고 꿰매면 회복이 늦어지고, 마취 안 하면 회복이 빨라질 것이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영화 촬영은 하루하루가 돈이다.
주인공인 내가 누워있으면 스태프 인건비, 장비 대여비가 등이 쌓이게 된다.
마취 안하고 꿰맨 후 일주일 동안 가회동 하숙집에서 요양했다.
투지 넘치는 배우로 인정받고 싶었다.
일주일 후 ‘아낌없이 주련다’ 초대 시사회가 단성사에서 열렸다.
주연 배우로서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내 모습은 처연하게 보였을 것이다.
검정 수트와 넥타이, 흰 와이셔츠에 붕대 감은 손을 받침대에 넣은 채로 손님을 맞이했다.
(27) 문학 세례
정연희 작가
영화배우는 머리가 비었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촬영 스케줄이 아무리 빡빡해도 책을 읽고, 사색을 했다.
젊은 시절 내 정신적 각성(覺醒)을 도운 문학 스승을 처음 만난 곳은 1962년 여름 종로 단성사 시사실이었다.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 초대 시사회에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다.
‘사춘기여 안녕’ 촬영 중 입은 부상으로 붕대 감은 손을 멜빵에 받친 나는 시사회장 쪽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그 중 한 분이 소설 ‘목마른 나무들’의 정연희 작가였다.
소설 ‘비극은 없다’의 홍성유 작가를 부군으로 둔 정 작가는 미모의 지성인이었다.
라디오와 신문으로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나보다는 한 살 위였다.
정 작가는 내게 “아, 주인공이시로구나”라며 웃으며 입장했다.
그 날 영화기자와 평론가, 지방 극장업자들이 모두 ‘아낌없이 주련다’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신성일 연기 개안(開眼)의 작품’이란 평이 이어졌다.
26일 열린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은 신성일씨가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신씨는 현역 시절 문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김민규 기자]
얼마 후 세운상가에서 영화 촬영이 있었다.
그날 따라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촬영이 중단됐다.
하늘을 보니 금방 그칠 비가 아니었다.
마침 대한극장에서 외화 ‘남태평양’을 틀고 있었다.
워낙 보고 싶었던 터라 극장에 들어갔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다가 중간 휴식시간에 휴게실 모퉁이에 앉아있던 정 작가를 발견했다.
“정 선생.”
“미스터 신, 여긴 웬일이에요. 미남이 여자 친구도 없이 혼자 왔어.”
“촬영 중에 비가 와서 구경 왔어요.”
우연히 극장에서 만났으니 매우 반가웠다.
이 날 촬영이 더 이상 없었기에 자유시간이었다.
소공동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의 전통한복 전시회에 들른 후 미국공보관실 근처 다동 일식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화여대 국문과 출신인 정 작가와 이야기하다 보니 정서적 충만감이 느껴졌다.
나는 즉흥 제안을 했다.
“비 오는 날 오후 3시는 대체로 쉽니다. 그 때 뵐 수 있겠죠.”
서울역과 가까운 염천교 부근, 정 작가의 아지트인 다방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
첫 번째 비가 올 때 가보니 정말 정 작가가 있었다.
정 작가는 내 영화를 분석해주고, 각종 문학작품을 알려주었다.
메마른 땅에 뿌리는 빗줄기 같은 지적 쾌감을 선사했다.
비 오는 날 오후 3시는 그렇게 나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시간이 됐다.
어느 날 저녁 정 작가의 집에 함께 간 적이 있다.
나는 문간방에서 글을 쓰고 있던 부군 홍성유 작가와 인사를 나눈 후, 차 한 잔도 함께 했다.
정 작가는 당시 김활란 박사의 자서전을 쓰고 있었는데,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정 작가로부터 책을 읽어야겠다는 강한 자극을 받았다.
정 작가는 우리 집에 가끔 전화를 걸었다.
무엇보다 훗날 시집까지 낼 정도로 문학소녀였던 어머니가 정 작가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정 작가와 통화하는 걸 좋아했고, 두 사람은 친구처럼 친해졌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비 오는 날 오후 3시, 문학 강의를 듣던 나만의 즐거움을….
(28) 통영 구타사건(상)
영화 ‘김약국의 딸들’(1963)에서 김혜정(맨 오른쪽)과 배우 박노식(가운데).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깨지면서 배운다고 하지만 이런 수모까지야….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사건이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1963년 봄 박경리 원작의 영화 ‘김약국의 딸들’에 출연할 때였다.
조연이었지만 ‘아낌없이 주련다’로 나를 키워준 극동흥업이 제작하고, 유현목 감독과 변인집 촬영기사가 참여한 영화였기에 기꺼이 합류했다.
주연은 엄앵란·최지희 등. 미국 유학파 출신의 김석강이 나와 나이도 비슷해 친구처럼 붙어 다녔다.
촬영 둘째 날이었다.
통영에는 여관이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다음 여관 골방에 배를 깔고 이야기에 열중했다.
당시 미국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김석강이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미국 이야기는 신기하기만 했다.
다른 스태프와 배우들은 저녁이 되면 술을 마시고, 외출도 나갔다.
나는 집안 내력상 술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김석강도 술을 못했다.
더구나 우린 신인이어서 돌아다니는 것도 부담스럽던 터였다.
당시 여관의 심부름꾼을 ‘조바’라고 불렀다.
그 여관은 일본식이어서 현관문을 열면 미닫이문이 나오고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는 구조였다.
감독이 가장 큰 방을, 배우들이 나머지 방을, 신인배우인 나와 김석강은 끄트머리 골방을 썼다.
조바 아이가 유 감독과 변 기사가 우리를 부른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촬영기사라고 했지, 촬영감독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선배가 부르는데 안 갈 수 없었다.
유 감독과 변 기사는 개다리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대작을 하고 있었다.
변 기사가 미닫이문 쪽으로 등 돌려 앉았고, 유 감독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 오른쪽으로 문을 보고 앉았고, 김석강은 나와 마주보았다.
우린 무릎 꿇고 공손히 앉았다.
유 감독은 아무리 마셔도 취기는 보이지 않고 코만 빨개지는 두주불사(斗酒不辭) 스타일이었다.
“너흰 왜 통영 구경 안 가냐.”
말하기 좋아하는 김석강이 대답했다.
“시나리오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기특해 보였을까.
나 역시 열심히 하는 후배들 보면 기분이 참 좋다.
유 감독은 흐뭇한 표정으로 한 잔씩 하라며 술을 따랐다.
조심조심 한 잔을 받아 마시는데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 미닫이문이 ‘쾅’ 소리와 함께 방 안쪽으로 넘어졌다.
문 앞에 있던 변 기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선배 배우 박노식이 비틀거리며 문틀을 잡은 채 서 있었다.
그가 발로 차는 바람에 문이 넘어졌던 것이다.
잔뜩 취한 박노식이 나를 향해 고함을 쳤다.
“이 새끼, 노승이(박노식의 동생)보다 못 생긴 게, 감독하고 촬영기사에게 술 사면 잘 찍어줄 줄 알아.” ·
그는 ‘아낌없이 주련다’로 인기를 얻은 내게 앙심을 품은 것 같았다.
졸지에 우리가 술을 산 셈이 됐다.
나는 그 상황에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때 불이 번쩍 했다.
박노식이 내 오른쪽 얼굴에 힘껏 발길질을 한 것이었다.
(29) 통영 구타사건(하)
1963년 개봉한 영화 ‘김약국의 딸들’의 출연 여배우들. 왼쪽부터 엄앵란·황정순·최지희·강미애·이민자. 촬영 당시 선배 박노식에게 맞은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내 경우가 그랬다.
1963년 봄 ‘김약국의 딸들’ 통영 촬영장에서 선배 박노식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했다.
오른쪽 얼굴을 맞았다.
술에 취한 행동이라지만 정말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
박노식은 내 오른쪽 가슴과 어깨도 짓밟았다.
변인집 촬영기사가 소리 지르며 박노식을 제지했다.
그는 박노식보다 한참 선배였다.
“노식아, 너는 후배만 보이고 선배는 안 보여?”
박노식은 변 기사를 뿌리쳤다.
유현목 감독도 “이 놈아, 선배는 안 보여”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유 감독은 당황하거나 화가 나면, 손가락으로 콧잔등의 안경만 치켜 올리던 ‘양반’이었다.
동료 김석강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참다 못한 변 기사는 박노식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자기 코에서 피가 나는 걸 확인한 박노식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이고~, 촬영기사가 배우 팬다.”
활극도 이런 활극이 없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박노식을 끌고 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었지만 속에선 별별 생각을 다했다.
‘아무 잘못 없이 얻어맞으면서까지 배우를 해야 하나? 영화 때려 치고 한 판 붙어?’
유 감독과 변 기사는 술상을 다시 차리라고 시켰다.
오른쪽 볼과 눈이 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런데도 내가 무릎을 꿇고 있으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두 분은 신성일이란 청년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다.
“영화계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다”라며 위로를 했지만 성난 마음에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눈치 빠른 변 기사가 “미스터 신, 들어가 쉬라”며 다독였다.
방에 가보니 김석강은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이 영화 이후 충무로를 떠난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촬영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배우들 사이에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엄앵란도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사단을 일으킨 박노식은 뒤늦게 나타났다.
술이 덜 깬 것처럼 보였다.
그가 민망한 지 “촬영합시다”라고 외쳤다.
아침이 되니 내 오른쪽 얼굴은 더욱 부어 올랐다.
화난 유 감독은 “노식아, 네가 쟤(신성일) 때려서 촬영 못할 정도야”라며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노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는데요.”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만약 그가 “성일아, 미안하다. 내가 술김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면, 사나이로서 그냥 털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내 얼굴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신필름에 있을 때는 이런 선배를 만난 적이 없었다.
‘두고 보자.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날 촬영은 왼쪽 뺨으로 때우고 지나갔다.
박노식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박노식은 고등학교 때 권투선수였다고 한다.
내가 권투선수 역을 두 번이나 맡은 것도 한편으론, 박노식을 겨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일단 화를 꾹 눌렀다.
그 사건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됐다.
(30) 충무로와 명동
1999년 사라진 을지로 국도국장 전경. 대한극장? 스카라? 명보극장 등 서울 충무로 인근 극장가는 신인 배우 신성일을 스타로 올려놓은 기반이 됐다. [중앙포토]
길 하면 영화 ‘라 스트라다’(La Strada·이탈리아어로 길)가 떠오른다. 잠파노(앤서니 퀸)와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의 유랑 길을 잊을 수 없다.
1960년 무렵 서울의 길, 땅을 보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배고픈 탓에 길바닥에 뭔가 없나 해서다.
60년이라고 해봐야 종전 7년 후다.
제대로 된 건물이 없었다.
50년대 후반 상경한 나는 충무로를 걷고, 명동을 구경하는 걸 낙으로 삼았다.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충무로 1가에 빵집 ‘태극당’과 전축기기상 ‘기쁜 소리사’가 있었다.
두 곳 사이에 ‘영양센터’라는 치킨집도 처음 생겼다.
쇠꼬챙이에 닭을 꿰어 빙빙 돌려 구워대는 영양센터 쇼윈도는 보통 볼거리가 아니었다.
당시 배고픈 사람들에게 얼마나 침이 넘어가는 풍경이었겠는가.
게다가 연통을 길 쪽으로 뽑아놓아 그 앞은 온통 닭 굽는 냄새로 가득했다.
얼마나 콧구멍을 자극했던지….
하지만 내 주머니 사정으론 어림도 없었다.
나중에는 약이 바짝 올라 그 앞으로 지나지 않고, 아예 태평로 큰 길로 돌아서 갔다.
‘한국의 할리우드’로 불린 충무로는 내게 의미가 각별하다.
서울대 공대·법대·의대 진학을 꿈꿨던 나는 그 길로 가지 못하고 충무로를 헤매다 신필름에 들어갔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은 영화계의 모든 시스템과 활동을 집약한 축소판이었다.
대한극장·을지극장·국도극장·명보극장·스카라극장·중앙극장 등이 모두 충무로 일대에 있었다.
미도파백화점 맞은편, 명동은 충무로와 사뭇 달랐다.
신필름에 들어가기 전까지 난 명동에 갈 용기도 없었다.
충무로에서 만났던 손시향을 생각해보라.
마카오 신사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쫙 빼 입은 듯한 장안의 멋쟁이가 명동을 누볐다.
청춘스타가 된 후 1주일에 한 번은 명동에서 촬영할 일이 생기곤 했다.
나를 포함해 신영균·남궁원·윤일봉 네 명이 명동 거리를 걸으며 새로 생긴 음식점을 찾아 다녔다.
우리가 명동 거리를 지나가면 행인은 물론 상점 주인들도 죄다 눈인사를 했다.
명동은 내게 성공을 상징하는 길이었다.
충무로의 길은 음식점으로 통했다.
충무로의 진고개, 종로와 명동의 한일관, 을지로 곰탕집 하동관, 청진동 선지해장국집 청진옥, 시청 뒤 콩나물 선지해장국집 부민옥 등이 단골집이었다.
지금도 예전 맛을 지켜가고 있는 음식점이다.
신필름에 들어가기 전에 다녔던 배우전문학원도 우연히 충무로 길을 걷다 만났다.
나는 학원에서 러시아 최고 연출가인 스타니슬랍스키 배우수업을 받았다.
바닥에 선을 하나 그어 놓고, 그것을 문이라 연상한 채 연기를 공부했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문을 넘나드는 연기를 연습했다.
얼마나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과제였는지.
서민가족의 가장 역할로 최고였던 대선배 김승호는
“길 가는 사람은 모두 내 스승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활기차게 또는 무겁게 걷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관찰하라. 그게 연기 교본이다”라고 조언했다.
지금도 시간이 나면 충무로·을지로·무교동·청계천 등을 걸어 다닌다.
얼마 전 시청 앞 광장에서 예쁘게 피어난 야생화 향기에 흠뻑 취했다.
얼마나 싱그럽던지. 74살 청춘의 ‘마이 웨이(My way)’다.
계속
編輯 ... 張河多 多張印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