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맨발이다 - 인생은 맨발 마라톤…도전하라
(61) 이태원 시대 <상>
엄앵란은 세련되고 화사한 이미지로 일급 광고 모델로 꼽혔다. [김한용 사진집 『꿈의 공장』에서]
나와 엄앵란의 신혼 보금자리가 된 이태원 181번지는, 미8군 부사령관인 콜터 장군 동상(지금의 녹사평역 사거리에 있다가 능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짐)이 내려다보는 하얀 집이었다.
미8군에서 흘러나온 물자와 G.I(미군)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흔하지만 보온병은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대단히 신기한 물건으로 통했다.
결혼 직전인 64년 여름 영화 ‘동백아가씨’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주인공을 맡은 엄앵란은 빨간 PVC로 모양을 낸 예쁜 일제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가지고 다녔다.
그 보온병은 남대문의 일명 ‘도깨비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하루는 ‘동백아가씨’의 작곡가 백영호가 촬영장을 찾아왔다.
‘동백아가씨’는 섬 처녀가 방학 때 잠시 내려와있던 서울 학생과 사랑을 나눈 이야기다.
여자는 연인을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가 캬바레 여가수가 된다.남자가 사회인이 되어 캬바레에 갔다가 여자와 우연히 재회한다.
이 때 엄앵란이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가 ‘동백아가씨’였다.
엄앵란은 자신의 노래를 지도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백영호에게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대접했다.
‘퐁퐁퐁퐁’ 소리가 나면서 커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에 모두들 놀라워했다.
신혼 보금자리가 된 서울 이태원 181번지 하얀 집.
캬바레도 난방이 잘 안 되는 시대인데 밤을 새워가며 뜨거움을 유지할 수 있다니.
아주 투박한 부산 사투리를 쓰는 백영호는 감탄사부터 연발했다.
“아쿠야!”
그는 깜짝 놀라며 “ 전기도 없는데 와이래 뜨겁습니꺼”라고 물었다.
생전 처음 보온병 커피를 마신 백영호는 이 영화의 주제가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노래를 부른 이미자도 단번에 무명가수에서 유명가수로 발돋움했다.
보온병은 사치품의 하나였다.
밥을 굶지만 않아도 행복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보온병 안은 수은이 칠해진 유리여서 약간의 충격을 받아도 깨지곤 했다.
나와 엄앵란의 보조원들이 보온병을 많이 깼다.
결혼 후 이태원집에 살면서 이런 고충을 해결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흑인 주임 상사가 이웃에 살고 있었다.
그 사람으로부터 선수 시절 쓰던 보온병을 케이스와 함께 선물로 받았다.
가죽으로 외관을 두른 그 보온병은 안이 스테인리스 스틸이어서 절대 깨지지 않았다.
내가 아스팔트에 떨어트린 적도 있는데, 밑이 약간 찌그러졌을 뿐 안은 멀쩡했다.
모두들 부러워하는 물건이었다.
우리는 상당히 오래 이 스텐 보온병을 썼다.
보온병 뿐만 아니라 커피도 밀수품이었다.
원두커피가 국내에 도입된 지 20여 년 됐지만, 그 당시에는 병에 든 인스턴트 커피밖에 없었다.
밀수품은 주로 여수 앞바다와 부산항 등을 통해 일본에서 들어왔다.
물건을 바다의 특정 지점에 가라앉혀 놓으면 잠수부가 건져내는 방식이었다.
이 물건들은 대구 양키시장·부산 국제시장·서울 남대문시장에 풀렸다.
그 곳엔 없는 물건이 없었다.
당국에서 가끔 단속을 실시해 밀수품을 걷어가곤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물건을 팔았다.
우리는 사각형 포장의 1회용 커피도 즐겼다.
이 커피는 미8군에서 흘러나온 C-레이션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가로·세로·높이 약 40㎝ 크기의 C-레이션 상자는 야전용 군 지원 식량이어서 GI 시계와 초콜릿을 포함해 별별 것이 다 있었다.
토마토 소스 미트볼·치킨 누들·빈(bean) 깡통을 따 먹으면 맛이 기가 막혔다.
쿠키에 딸기잼을 찍어 먹으면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입 안에서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이란 삶의 또 다른 낙이었다.
(62) 이태원 시대 <하>
신성일·최지희(왼쪽) 주연의 영화 ‘의형제’(1965). 신성일은 그 해 서울 이태원집에서 신혼을 보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태원 181번지는 영화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됐다.
196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코카콜라·오렌지주스·커피·우유를 맛볼 수 있는 곳이 흔했겠는가. 우리 집은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항상 분주했다.
우리와 스킨십을 하면서 아이스크림까지 맛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엄앵란은 배우 활동을 쉬고 있었지만 집안에서도 영화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다.
제작부장들부터 한두 마디씩만 들어도 엄청난 정보가 됐다.
‘신성일을 붙들기 위해 제작부장들이 이태원집 앞에서 거적을 깔고 밤을 샜다’는 말도 있었는데, 그건 과장이다.
손이 큰 엄앵란은 아이스크림을 큰 통으로 들여놓았다.
큰 박스로 포장된 닭다리·감자튀김 등도 들어왔다.
냉장고로는 감당이 안됐다.
냉장고와 같은 크기의 냉동고도 있었다.
에어컨 역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물건이었다.
‘Needs’라는 브랜드의 에어콘을 3층에 달아놓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한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빨리 단 것이다.
이태원집 3층을 증축한 사람은 김수용 감독의 동생이었다.
아주 멋스럽게 지어 나로선 만족스러웠다.
그는 이태원집 3층과 함께 미8군 지하벙커를 함께 공사하고 있었다.
그 지하벙커가 얼마나 비밀스러웠는지, 건축가 역시 자신이 맡은 부분 이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미8군 기지를 보면 높은 건물이 없다.
지하벙커가 더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계약 당시 공사를 마치면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실제로 김씨는 지하벙커 완성 직후 미국으로 이민 갔다.
이태원 문화는 우리집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본토의 각종 생활용품 목록이 적힌 백화점 ‘시어즈(Sears)’ 카탈로그가 있었다.
1000페이지 분량으로, 잔디 깎는 기계부터 등산용품까지 망라했다.
나와 엄앵란은 주로 옷을 보았다.
배우에게 옷은 생명이다.
나와 엄앵란의 경쟁력 중 하나가 옷이었다.
다른 배우들은 옷에 관한 한 나를 따라올 수 없었다.
필요한 물건은 미군 남편으로 둔 한국 부인들을 통해 조달했다.
그들은 군사우편으로 물건을 가져왔다.
물론 면세여서 이문이 컸다.
출입증을 얻어 미8군 기지를 구경하는 것도 볼거리였다.
미군 레스토랑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갈비탕을 팔 정도였다.
무엇보다 뼈에 고기에 엄청나게 달려 나왔다.
부대찌개는 우리의 슬픈 역사 속에 태어났다.
6·25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대구의 시장에 가면 아줌마들이 좌판에서 부대찌개를 팔았다.
그땐 ‘부대찌개’란 이름도 없었다.
‘꿀꿀이죽’이었다.
대구에도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군 식당 쓰레기통에서 나온 음식물을 씻어낸 다음 푹 끓여냈다.
닭다리와 소시지 정도만 형태가 남았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친구들이 먹고 있는 중에도 혼자 먹지 않았다.
이태원 181번지에서 살 때 수많은 영화가 탄생했다.
65년 ‘적자인생’ ‘상속자’ ‘춘몽’ ‘흑맥’ ‘성난영웅들’ ‘밀회’ ‘의형제’ 등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영오 일병 총기 사건을 다룬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같은 사회고발 작품도 있었다.
나는 어떤 작품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63) 고은아
신성일·고은아 주연의 영화 ‘소문난 여자’(1965). 고은아는 60년대 중반부터 청순가련한 이미지로 뭇 남성을 사로잡았다. 다른 여배우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매력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 윤정희·문희·남정임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 속에서도 청순 가련한 매력으로 자기 영역을 확고히 했던 여배우가 있었다.
고은아(본명 이경희)다.
그녀는 65년 6월 개봉한 ‘란의 비가’로 데뷔했다.
상대역은 나였다.
극동흥업은 그해 김기덕 감독의 히트작 ‘남과 북’에 이어 ‘란의 비가’를 기획하면서 암에 걸린 청순한 소녀를 공모로 뽑았다.
바로 홍익대 공예과 출신의 고은아다.
‘남과 북’은 문주란이 부른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주제가로 더 유명했다.
이후 패티김의 목소리로 KBS ‘이산가족 찾기’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다.
‘남과 북’ 여주인공(엄앵란) 이름이 ‘고은아’였다.
극동흥업 측이 그 이름을 딴 것이다.
고은아는 비교적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로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문예영화 풍의 멜로드라마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란의 비가’에 이어 대표작인 ‘갯마을’(65년)에선 총각에게 유혹을 당해 도망가는 해녀 해순 역으로 남자들을 녹였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씨는 ‘갯마을’의 고은아를 ‘해풍에 흐느적거리는 야생화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고은아는 너무나 착했다.
좋은 집안 출신으로 집은 중랑교 방향의 휘경동이었다.
그녀는 ‘란의 비가’를 찍으며 나와의 인연을 털어놓았다.
부산여고 시절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다 한다.
고3 어느 날 책갈피에 끼워둔 신성일 브로마이드를 보고 있다가 선생님께 들켰고, 그 자리에서 야단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티없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쩌다가 선생님과 함께 출연하게 되었을까요?”
고은아는 스크린에선 드러나지 않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긴 팔에 털이 많았고, 매운 것을 좋아했다.
부산 사람이라 그런지, 음식을 아주 맵게 해 먹었다.
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촬영 중 고은아를 놓고 장난을 친 적이 있다.
66년 한여름 인천 월미도에서 고은아와 함께 이형표 감독의 ‘소문난 여자’를 찍었다.
곽정환 합동영화사 사장이 고은아에게 넋이 빠졌고, 그가 일방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 차는 15살. 곽 사장은 촬영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여주인공에 대한 그의 관심과 배려가 눈에 띌 정도였다.
곽 사장을 골려 주기로 마음먹은 나는 포옹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컷’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꼭 껴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곽 사장이 고함쳤다.
“미스터 신, 풀어. 풀라고.”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했다.
곽 사장은 끈질긴 구애 끝에 67년 고은아와 결혼했다.
결혼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고은아의 가족들이 곽 사장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는 며칠, 몇 번인가 고은아의 집을 찾아가 무릎 꿇고 그녀를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고은아는 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끝으로 스크린을 떠난 후 신앙 생활에 열중했다.
현재 CBS TV 간판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에서 임동진과 함께 진행을 맡고 있다.
고은아의 ‘란의 비가’는 불치병 영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이후 국제극장에서 개봉한 ‘러브스토리’(71년)를 비롯해 ‘선샤인’ ‘라스트 콘서트’ 등 불치병을 소재로 한 외화가 70년대 초 극장가를 휩쓸었다.
지금도 고은아가 매운 것을 즐겨먹는지 궁금하다.
(64) 납세왕
2008년 4월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핸드프린팅 행사에 모인 신성일·윤정희·신영균·문희(왼쪽부터).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스타들이다. [중앙포토]
1960년대 중반 이후 매년 3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덕분에 연예·예술계를 통틀어 납세왕 타이틀은 항상 내 차지였다.
인기·수입·납세 규모 면에서 영화 배우는 다른 직종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낙선 국세청장이 고액 납세자에게 표창을 시작한 65년부터 난 연예·예술인 분야에서 납세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기업 분야에선 합판을 생산하는 부산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이 1위였으니, 우리나라 기업 규모가 얼마나 작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70년대 들어 외자도입과 수출 정책이 시행되고, 포항제철이 가동되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국세청의 고액납세자 표창 행사는 이 청장이 상공부 장관으로 영전한 69년까지 계속됐다.
나는 총수입의 20~30%를 세금으로 냈다.
당시 영화가 서비스업종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금도 엄청났다.
할리우드 스타들도 세금을 많이 냈지만 개인적으로 인력을 고용하고 지출하면 그만큼 혜택을 주었다.
난 당시 서비스 업종에서 세금 징수의 맹점을 발견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로비를 했다.
결국 허사로 돌아가면서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
65년 내가 낸 1기분(6개월) 세금은 190만원이었다.
반면 가수 분야 1위 최희준은 9만8000원에 불과했다.
나는 68년 965만원의 소득을 올려 그 중 339만3362원을 세금으로 냈다.
국세청이 언론을 통해 발표한 68년 납세 랭킹 자료를 보면 다른 영화배우, 다른 직종과 더욱 격차가 벌어진다.
정부 당국에서 나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1기분 세금으로 낸 340만원은 큰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가수 1위 이미자, TV 탤런트 1위 나옥주와 납세액이 몇 십 배 차이가 났다.
내무장관이 밤 촬영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는 야간통행증을 내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나는 그 통행증을 차에 붙이고 전국을 누볐다.
박노식 등 일부 배우는 서울 지역만 제한적으로 다닐 수 있는 서울특별시장 명의의 야간통행증을 받았을 뿐이다.
내 스스로 ‘신성일은 최고’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65) 세 남매
1976년 서울 이태원 자택에서 촬영한 신성일 가족사진. 왼쪽부터 아들 강석현, 아내 엄앵란, 큰딸 강경아, 작은딸 강수화, 그리고 신성일. 작은딸 수화는 어려서부터 엄마의 판박이였다. [중앙포토]
서울 이태원 181번지는 우리 부부에게 귀한 선물을 주었다.
세 아이 모두 그 집에서 태어났다.
큰딸 경아(1965년생), 아들 석현(67년), 작은딸 수화(70년)다.
부모가 스타부부였고, 집이 ‘영화계 사랑방’이었으니 이보다 더 특수한 환경이 있었을까.
별별일이 많았지만 아들과 관련된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석현이가 세 살 때였다.
나는 영화에 바빠 집안일을 잘 몰랐다.
20일 가까이 지방촬영을 마치고 귀가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3층 목욕탕에서 아들과 함께 목욕을 했다.
그런데 아이가 바싹 말라 있었다.
갈비뼈가 앙상했다.
그 전까진 포동포동했 는데….
아들을 돌보는 가정부에게 물었다.
“순이야, 애가 왜 이렇게 북한의 실정이냐?”
‘북한의 실정’이란 말랐다는 것을 뜻하는 당시 유행어였다.
순이가 머뭇머뭇 대답했다.
“석현이가, 밥을 안 먹어요. 하루 종일 아이스크림과 콜라만 먹어요.”
기가 막혔다.
아이스크림과 콜라는 아내가 영화 관계자들을 대접하려고 들여놓은 것이다.
냉동고도 장만했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은 것도 아니고, 아이스크림과 콜라 때문에 아이가 그런 꼴이 되다니.
화가 치밀었다.
“이제부터 애한테 아이스크림과 콜라 주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냉동고 없애버려.”
하루 아침에 우리 집에서 아이스크림과 콜라가 사라졌다.
엄앵란은 반대했었지만, 내가 화나서 소리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울어댔다.
나는 밥 안 먹으면 차라리 굶기라고 했다.
사흘 동안 촬영장과 집을 드나들며 아이를 감시했다.
고집을 피우던 석현이는 결국 사흘 만에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부터 “미국 사람의 검은 물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특정상표를 지칭하지 않기 위해 콜라를 ‘검은 물’이라 한 것이다.
건강에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식품 아닌가.
난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1988년 미국 LA 사막 한복판 하이웨이에서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 로케이션을 할 때조차 콜라에 눈길도 안 주었다.
식사로 햄버거와 콜라가 나올 땐 차라리 주스나 냉수를 마셨다.
큰딸 경아는 65년 나와 엄앵란이 별거하면서 국민학교 입학 때까지 처가에서 자랐다.
외박이 너무 잦았기에 딸을 집에 데려다 놓으라고 주장할 입장이 아니었다.
묵인 아닌, 묵인이 돼버렸다.
외할머니는 경아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친할머니는 그에 비하면 애들을 이성적으로 대했다.
그런데 경아가 어느 날 혼자서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며 이렇게 말했단다.
“할머니, 나 이태원 집에 갈래요. 데려다 줘.”
경아는 자기가 리라국민학교에 입학하는 걸 알았다.
리라국민학교는 노란색 교복과 스쿨버스로 아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외할머니는 속으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아이란 자연히 부모 품에 안겨오는 법이란 걸 느꼈다.
아버지로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작은딸 수화는 어릴 적부터 엄앵란의 판박이였다.
어디서나 엄마 치마폭을 붙잡고 늘어졌다.
애 엄마가 귀찮아할 정도였다.
지금 애들이 의젓하게 자란 모습을 보면 언제 일이던가 싶다.
(66) 부모의 길
스타 부모와 아이들은 이래저래 서로 마음 고생이 심했다. 왼쪽부터 둘째 딸 수화, 아내 엄앵란, 첫째 딸 경아, 신성일, 아들 석현. [김한용 사진집 『꿈의 공장』 (눈빛·2011)에서]
우리 아이들은 스타 부모를 만난 탓에 남모르는 고통을 겪었다.
큰딸 경아(1965년 출생), 아들 석현(67년), 작은 딸 수화(70년)는 어린 시절부터 외출을 싫어했다.
우리 가족이 나서면 사람들은 항상 세 아이의 생김새를 비교했다.
‘누군 엄마 닮았네, 아빠 닮았네’ 하며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동물원의 동물 보듯, 무턱대고 껴안고 만지는 일도 잦았다.
아이들에겐 이런 상황이 큰 부담이었다.
고급식당이 없던 시절이었다.
아이들과 갈 수 있는 곳은 종로 한일관 정도였다.
그것도 주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오붓한 식사가 불가능했다.
아이들은 특히 초등학교 때 가장 곤욕을 치렀다.
아이들과 스킨십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아이들에겐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인 아버지로 비춰졌던 것 같다.
내 판단이 서면 바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세 살배기 석현이에겐 그토록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콜라를 빼앗아간 존재가 아버지였다.
문제가 있으면 그냥 두고 못 지나가는 성격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부성애를 표현하는 방식을 몰랐다.
‘내리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큰딸 경아와 석현이를 리라국민학교에 입학시킨 것도 내가 결정한 사항이다.
65년 개교한 리라국민학교는 당시만 해도 알음알음 들어가는 학교였다.
설립자인 권응팔 교장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남산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텐트 생활을 하다 성공했다.
그는 남산 언덕의 빈 땅을 개발해 리라국민학교를 지었다.
아이들은 아무 결정권이 없었다.
아이들이 나와 엄앵란, 양쪽 입장을 이해하게 된 것은 철이 든 이후다.
부부간에 취미나 성격이 꼭 맞았던 것도 아니다.
나와 엄앵란은 한마디로 ‘엇박자 부부’다.
서로 맞추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47년 세월이 흘렀다.
나는 보호자로서는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서로 껴안고, 뒹굴다가 함께 엎어지는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면 충분히 불만스러웠을 수 있다.
이 땅의 많은 아버지가 아마도 나 같은 경험을 겪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감싸고 도는 외할머니도 나를 힘들게 했다.
우리 가족은 1971년 무렵 이태원 181번지를 떠나 한남동에 새 집을 지어 1년 살았다.
72년 1차 오일쇼크 영향으로 동부이촌동 삼익아파트로 이사했다.
같은 동네의 현대아파트 시절엔 우리 가족과 외할머니가 나란히 24동 1201호와 1202호를 썼다.
아이들은 집에서 밥을 먹고 나면, 외할머니에게 몰려갔다.
외할머니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혼날 것 같으면 거짓말을 해왔다.
속으로 무척 언짢았다.
내가 만든 가풍이 있다.
아이들이 음식 가리지 않도록 하고, 알코올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 13살이 되면 집에서 와인을 마시도록 가르친다.
대학교 때 술 때문에 사고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들이든, 딸이든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하지만 인생 전체에서 보면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긍정적 사고를 가지면 모든 게 행복이다.
(67) 독수리의 친구들
신성일·문희가 주연한 영화 ‘흑맥’(1965) 포스터.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인 문희의 데뷔작이다. 아쉽게도 필름은 남아있지 않다.
마음이 맞는 파트너를 만나면 실력을 120% 발휘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만희 감독”을 꼽는다.
그와 처음 만난 영화가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이문희 작)을 각색한 ‘흑맥(黑麥)’(1965)이다.
‘흑맥’(검은 보리)은 당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썩은 보리’라고도 했다.
1960년대 서울역 맞은편(현재 대우빌딩 자리)은 집창촌이었다.
그 부근의 염천교는 호객 행위를 하는 입구였다.
나는 서울역 집창촌 뒷골목의 작은 보스인 독수리 역을,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가장 먼저 등장한 문희는 서울역에서 헤매다 부하들의 안내로 날 만나는 청순한 처녀 역을 맡았다.
눈빛만 봐도 통할 정도로 나와 이 감독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하드보일드한 청춘영화를 만드는 데 우리보다 더 어울리는 단짝은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이 감독의 스타일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그 전까지 이 감독은 주로 장동휘·박노식·최무룡 등 선배 배우들과 작품을 많이 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63) 등 대단한 작품도 만들었지만 그는 작품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이후 나온 ‘만추’(66), ‘원점’(67), ‘휴일’(68) 등은 우리의 호흡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흑맥’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연극배우 겸 탤런트 송재호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내 조직원 중 하나로 출연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찾아왔다.
나는 부산에서 장사하는 송재호의 누나와 잘 아는 사이였다.
그 분은 “우리 재호, 잘 좀 봐 줘요”라고 부탁하곤 했다.
송재호는 ‘흑맥’을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다.
연극배우인 그에게 여유가 있을리 없었다.
내가 이문희 작가에게 연극 저작권을 사서 송재호에게 주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그가 TV의 터줏대감이 된 걸 보면 무척 흐뭇하다.
‘흑맥’은 문희(본명 이순임)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이 감독은 여배우 문정숙의 성과 자신의 이름 끝자를 따서 ‘문희’란 예명을 지어주었다.
한국영화는 당시 연인의 하룻밤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
나와 엄앵란은 몇몇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여자가 아침에 남자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장면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하곤 했다.
이 방식은 ‘흑맥’에도 적용됐다.
문희는 옷이 없어서 독수리의 옷을 빌려 입은 채 비 맞는 연기를 해야 했다.
모든 스태프가 지켜보고 있었다.
신인배우 문희로선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섹시한 설정이었다.
여주인공은 브래지어를 차지 않고, 앞 단추를 모두 푼 채 남자의 와이셔츠만 걸쳤다.
남자 와이셔츠여서 문희의 몸에는 다소 헐렁했다.
지붕 위에서 화분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비를 연출했다.
문희는 빗속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런데 물이 한 쪽으로 쏠려서 옷이 붙어버리는 바람에 다른 한 쪽이 열렸다.
문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기를 계속 했다.
깜짝 놀란 이 감독이 다급하게 외쳤다.
“컷, 컷!”
연출적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자연스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심의 규정 때문에 이 장면은 극장에서 틀 수 없었다.
신인배우 문희는 그만큼 촬영에 열중했다.
그만한 집중력이 있었기에 톱스타가 될 수 있었다.
좌로는 이 감독, 우로는 문희·송재호.
나 역시 촬영장에서 독수리가 돼 신나게 날아올랐다.
(68) ‘짱구형’ 이만희 감독의 추억
1960년대 한 기차역 철로에서 촬영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만희 감독. 신성일과 ‘흑맥’ ‘원점’ 등을 함께 한 이 감독은 액션 연출에도 강했다. [중앙포토]
이만희 감독(1931~75)과의 호흡은 하드보일드한 액션에서 진가를 발했다.
1960년대에 가장 어려운 촬영 분야가 액션이었다.
러닝타임 1분 20초의 짧은 액션을 만들어내려면 밤새도록 찍어야만 했다.
외국은 풀샷 카메라·클로즈업 카메라와 좌우의 카메라로 동시에 촬영하는 반면,
우리는 카메라 한대로만 찍으니 배우가 얼마나 고달픈지 몰랐다.
여러 각도의 움직임을 일일이 재현해야 했다.
이 감독과 나는 군말 없이 ‘흑맥’(65), ‘원점’(67), ‘휴일’(68)의 고된 액션 신을 소화했다.
‘흑맥’에서 주인공 독수리가 맥주홀에서 싸우는 장면이 있었다.
카메라는 맥주홀 스탠드를 걸치고 홀 전체를 비추도록 설치됐다.
이 감독은 내가 여러 번 얻어맞다가 스탠드에 세워진 맥주병들을 팔로 치면서 쓰러져 머리가 카메라 앞에 처박히는 연출을 의도했다.
정신 없이 촬영하다가 이 감독의 “컷!” 소리에 눈을 떴다.
팔에 맞아 깨진 맥주병의 삐죽삐죽한 날이 내 코 바로 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만 더 고개를 숙였더라면 영락없이 얼굴이 찢겼을 것이다.
열중하고 집중력을 가지면 하늘이 상처 하나 안나게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됐다.
‘흑맥’ 이후 2년 만에 이 감독, 문희와 다시 뭉쳐 찍은 ‘원점’은 신성일 액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소룡이 탑에서 압둘 자바와 대결을 벌이는 홍콩 영화 ‘사망유희’를 대단한 액션으로 꼽는 분들도 많겠지만,
난 그에 못지않은 ‘원점’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원점’에서 내가 맡은 주인공 석구는 자신의 조직 보스에 의해 제거 대상이 된다.
난 석구가 조직원들과 사생결단의 혈투를 벌이는 장면을 곳곳에서 촬영했다.
밤의 한기 속에서 충무로 대한극장 사무실 3층부터 지하 1층까지 4개층을 결투 무대로 삼았다.
때리고, 맞고, 굴러떨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 감독은 매층마다 카메라 앵글과 라이트를 바꾸어 분위기를 달리했다.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상대를 깨면서 올라갔다면, 나는 적을 쓰러뜨리면서 아래로 향했다.
대역도 없고, 카메라는 한 대뿐.
모든 걸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 감독이 배우를 아끼는 마음은 대단했다.
“신짱, 괜찮아?”
여섯 살 위의 이 감독은 나를 ‘신짱’이라 불렀다.
운동으로 단련된 내 몸은 쇳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아주 멀쩡했다.
계단에서 그렇게 굴러 떨어지는데도 상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 아닌가 싶다.
한숨 돌린이 감독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갔다.
촬영이 끝났을 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만희는 단 한 컷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어 이 감독에게 ‘OK’ 사인을 받으면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즐겁게 일했기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짜증 나면 사고가 따라온다.
64년 ‘욕망의 결산’ 때 내가 부산 태종대에서 당한 사고를 생각해보라.
가장 싫어하는 상황 속에 나를 밀어넣었다가 배우 생활을 끝마칠 뻔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새벽 거리로 나섰다.
상쾌했다.
내 인사법은 간단했다.
“짱구형, 바이 바이.” ‘
짱구형’은 유달리 머리가 큰 이 감독에게 내가 지어준 애정 어린 별명이었다.
이 감독은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하고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69) 금강굴 혁대 액션
이만희 감독의 ‘원점’. 신성일과 문희가 설악산 금강굴로 향하는 장면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만희 감독과 호흡을 맞춘 1967년작 ‘원점’의 하이라이트는 설악산 금강굴 혈투였다.
그해 초가을 설악산은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불타기 직전이었다.
이 감독은 주 촬영지가 되는 금강굴 앞에서 어떤 액션을 연출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우리는 금강굴 부근 산장에 짐을 풀고 다음날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형제라도 그보다 더 정답기는 어려웠을 거다.
학창 시절 연극을 했다는 그는 나를 부러워했다.
“신짱, 내가 신짱처럼 잘 생겼으면 영화배우 하고 있을 텐데. 거참, 머리만 커서….”
그는 머리가 하도 커서 웬만한 모자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짱구형’이라고 부른 것이다.
양미간도 넓어 관상학적으로 마음이 커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 감독이 고민한 대목은 주인공 석구가 자신을 죽이려는 조직원 두 명과 금강굴을 배경으로 철제 계단에서 싸우는 장면이었다.
지금도 금강굴로 연결되는 철제 계단은 밑에서 보면 아찔하기 이를 데 없다.
만에 하나, 굴러 떨어지기라도 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웠다.
내가 철제 계단으로 도망가고, 두 명이 따라올라오는 설정.
곰곰 생각에 잠겨있던 이 감독이 갑자기 물었다.
“신짱, 지금 무슨 혁대 하고 있어?”
나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바지에서 혁대를 빼냈다.
두껍고, 튼튼한 가죽 혁대였다.
워낙 움직임이 많은 탓에 절대 끊어지지 않는 혁대를 차고 다녔다.
이 감독은 자기 쪽 혁대 끝에 고리를 걸어 원형을 만들고, 내가 다른 쪽을 잡게 했다.
우리는 고리를 끼운 혁대를 양쪽에서 잡아당겨 보았다.
이 감독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감독의 아이디어는 이러했다.
배수진을 친 석구가 철제 계단에 혁대를 묶고 왼손을 거기다 연결한 채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석구가 아무리 얻어맞더라도 떨어질 일이 없다.
게다가 혁대의 반동을 이용해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다.
듣고 보니 대단한 발상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액션을 촬영한 영화는 없었다.
나는 다음날 철제 계단 중간에서 왼손을 혁대에 묶고 오른손으로 신나게 싸웠다.
발 아래로는 천불동 계곡이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카메라 앵글을 금강굴 쪽에서 아래로 잡으면 화면에 엄청난 긴장감이 담겼다.
김기영 감독 등 대다수 감독이 콘티에 모든 장면과 동작을 세밀하게 적어넣었다.
계획한 시간 내에 액션을 다 끝내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카메라 필름이 대단히 귀한 시대였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시간과 필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반면 이 감독의 콘티는 아주 깨끗했다.
그는 콘티에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부표만 쳐놓았다.
다른 사람이 훔쳐 보아도 알 길이 없었다.
모든 장면이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었다.
다른 감독들은 액션 장면을 내게 맡기다시피 했다.
특히 신인 감독들은 더했다.
나로선 큰 부담이 됐다.
먼저 영화에서 했던 동작을 리바이벌 하면 촬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재탕한다고 욕 먹기 싫었다.
매 영화마다 새로운 액션의 디테일을 넣으려고 고심했다.
그 결과 지방 건달들은 나만 보면 이렇게 물었다.
“신형, 정말 잘 싸웁니까? 맞짱 한 번 떠볼까요?
(70) 신영균의 두 얼굴
1970년 신성일과 자리를 함께한 선배 영화배우 신영균(왼쪽). 일찌감치 정치에 뜻을 둔 그는 15대·16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의원 배지를 달았다. [중앙포토]
인생은 제각각이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걸었으면서 전혀 다르게 산 사람이 선배 영화배우 신영균(83)이다.
신영균은 같은 시대에 활동하면서도 나와 함께 찍은 작품은 별로 없다.
나처럼 그도 주인공만 맡았기 때문이다.
60년대 중·후반은 내가 한창 돈을 벌던 시기였다.
영화와 예술계에서 나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벌던 사람이 그였다.
이태원 181번지 시절인 67년 어느날, 아내 엄앵란은 충무로 복덕방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명보극장 옆 빵집 명보당을 사도록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명보당은 충무로 태극당 다음으로 장사가 잘 됐다.
200만원이면 1층의 명보당 인수가 가능하고,
300만원이면 3층 건물 전체를 인수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인수를 포기하고 말았다.
명보당을 임대 운영하던 주인이 이성구 감독의 누나였다.
이 감독은 67년 나와 이어령 소설 원작의 ‘장군의 수염’을 찍었다.
매우 지성적인 분이어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의 누나는 “1년만 더 운영하면 이 가게를 살 수 있으니 인수를 포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엄앵란에게 “우리가 빼앗다시피 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말했다.
우리가 이 가게를 반드시 인수해야 할만큼 절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가게의 소유권은 신영균에게 넘어갔다.
신영균이 인수한 명보당은 크리스마스 철에는 케이크를 사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유명 영화배우 신영균의 가게라는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더욱 잘 됐다.
그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70년 어느날 신영균이 나와 윤일봉·남궁원을 명보당 3층으로 불렀다.
명보당의 재력을 바탕으로 공화당 영등포 을구 지구당 위원장 직을 맡았다.
나는 같은 시기, 공화당 조직부장에게 소공동 조선호텔 맞은편에 자리한 공화당 중앙당사로 붙들려 갔다.
그 자리에서 입당 도장을 찍으라길래 화장실에 간다 둘러대고 도망쳤다.
이것이 딜레마였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게 됐는데, 신영균의 상대는 민주당 김수한 의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돈만 들어가지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몇 백 만원이 그냥 깨진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공화당 실력자들과 두루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부탁했다.
“성일아, 네가 길전식 사무총장에게 신영균이 지구당 위원장 자리 사임한다고 말해줘라.”
길 사무총장은 공화당 내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중도하차는 정치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지만 신영균으로선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사직동 부근의 길 사무총장 댁을 찾아갔다.
마침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고 있는 그에게
“총장님, 신영균 형님을 영화배우로 돌려주십시오.
형님이 김수한 의원과의 대결이 힘들어 위원장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답니다”고 청했고 어렵게 승락을 받아냈다.
그 다음 수순은 위원장 사퇴를 신문에 내는 것이었다.
그는 광고 문구에 ‘지구당 위원장 신영균, 개인 사정으로 사퇴합니다’라고 썼다.
정치에 미련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장에 그 직함을 ‘영화배우 신영균’으로 고치라고 했다.
신영균은 결국 15대(96)·16대(2000)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했다.
- 계속 -
編輯 ... 張河多 多張印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