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맨발이다 - 인생은 맨발 마라톤…도전하라
(51) 불 꺼진 4호실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 1964년 LP판 재킷. 신성일과 엄앵란은 이 영화를 부산에서 찍으며 잊지 못할 하룻밤을 보냈다. [고서점 호산방 제공]
매일 얼굴을 보면서도 연애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신세. 엄앵란을 내 여자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64년 여름 ‘동백아가씨’의 3박4일 부산 촬영일정이 나왔다.
더 좋은 기회는 앞으로 없을 것 같았다.
서울에선 사람들 때문에 손 한 번 잡을 시간이 없었다.
엄앵란의 집은 남산동 외교구락부 못 미쳐 오른쪽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두어 번 식사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집은 컸지만 친척들의 왕래가 잦았다.
또 그 집 위쪽에 다른 집 두세 채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들 동향을 눈치챌 수 있어 나는 차 조수석에 몸을 숨긴 채 들어가곤 했다.
나와 엄앵란은 3박4일 여정을 철저히 준비했다.
엄앵란은 여동생, 보조하는 아이, 기사와 함께 59년형 시보레 스테이션웨건을, 나는 남자 일행 셋과 함께 크림색 닷지 웨건을 탔다.
이태원 미군부대에서 먹거리와 아이스박스를 구입해놓았다.
촬영팀이 머문 곳은 부산 중앙동 반도호텔.
부산역에서 가까웠다.
반도호텔 부근에선 ‘40계단’이 유명했다.
65년 나·최지희 주연의 ‘무정의 40계단’, 99년 안성기·박중훈 주연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무대가 된 곳이다.
해방 후 귀환동포, 한국전쟁 피난민이 이 주변에 모여 살았고, 동광동·영주동 판자촌을 가려면 이 계단을 거쳐야 했다.
반도호텔은 말만 호텔이었다.
전체 5층으로 한 층에 방 5개가 전부였다.
나와 엄앵란 식구들이 5층을 썼다.
계단에서 올라오면 1호실이 가장 먼저 나오고, 2호실부터 5호실까지 횡으로 늘어섰다.
1호실은 내 식구, 2호실은 엄앵란 기사, 3호실은 엄앵란 여동생과 코디, 4호실은 엄앵란, 5호실은 내 방이었다.
부산을 떠나기 전날 밤, 엄앵란 방에 잠입하기 위해 눈치를 살폈다.
밖에선 방범대원이 통행금지를 알리는 딱딱이 소리가 들렸다.
나를 제외하고 남자가 넷.
그들은 양쪽에서 바리바리 싸온 음식을 먹은 다음 복도에 앉아 밤새 고스톱을 칠 기세였다.
내가 엄앵란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꼴이 됐다.
호텔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2·3호실, 4·5호실 욕실이 마주한 구조였다. 4호실과 5호실에는 파이프가 붙어있었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좁은 욕실 들창을 통해 4호실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낭떠러지나 다름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욕실 밖으로 물이 흐르는 홈통이 지나갔다.
나는 야생동물처럼 민첩하게 창틀을 붙잡고 홈통에 발을 디딘 채 4호실 들창 앞에 이르렀다.
창문을 두드리자 불이 켜졌다.
넉살 좋게 말했다.
“미스 엄, 나 떨어져 죽어.”
깜짝 놀란 엄앵란은 나를 끌어올렸다.
생명을 건 모험은 대성공이었다.
그날 밤 목욕을 막 끝낸 엄앵란을 처음으로 안을 수 있었다.
잊지 못할 초야였다.
엄앵란은 창틀에 매달린 나를 보고 ‘아,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문 밖으로 뛰어나가면 모두에게 알리는 꼴이 된다.
한 살 연하의 내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날 운명을 받아들였다.
(52) 빅 뉴스
1964년 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보고 싶은 얼굴’. 두 사람은 그 해 10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결혼 발표를 했다.
엄앵란과 결혼을 피할 수 없게 됐다. 1964년 10월 어느 날 엄앵란이 자신의 남산동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 날 들은 이야기는 충격 자체였다.
임신 3개월째라고 했다.
‘동백아가씨’ 촬영 때 부산 반도호텔에서 가진 초야에 임신이 됐던 것 같다.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어릴 적부터 ‘경상도 사나이’라는 강박관념을 갖고 자랐던 터다.
남자라면 의리를 지키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믿어왔다.
자연스럽게 ‘이 여인을 책임져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와 엄앵란의 관계는 극비였다.
‘맨발의 청춘’을 찍은 김기덕 감독마저 우리가 사귄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다.
지금도 연상연하가 자연스럽지 않은데 엄앵란이 한 살 위였기에 연인으로 맺어질 것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오죽하면 차태진 극동흥업 사장은 눈치도 없이 “엄앵란은 김기덕 감독과, 너(신성일)는 공미도리와 결혼해라”라고 했을까.
내가 그 자리에서 엄앵란과 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차 사장도 우리의 결혼을 알게 됐다.
그 직후 차 사장이 “큰일 났다. 너희들 이야기를 쓴다고 기자들이 벼르고 있다. 너희가 먼저 터트려라”며 엄앵란에게 다급하게 전화했다.
기자 출신인 그의 조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차 사장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흘렸다가, 사건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부랴부랴 수습한 게 아닌가 싶다.
그 해 10월 20일 소공동 조선호텔 레스토랑에서 약혼식 겸 결혼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장안의 기자란 기자는 다 모여 홀이 꽉 찼다.
60년대 최고의 빅 뉴스였다.
기자회견장에는 우리 둘과 양가의 어머니만 나왔다.
엄앵란은 급하게 준비한 탓에 다소 촌스러운 한복을 입은 것으로 기억한다.
25일 후인 11월 14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우리는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 촬영을 위해 경주로 직행했다.
불국사 앞 불국사관광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지금 불국사 주차장 자리다.
경주 시민들이 다 나온 것 같았다.
우리는 거기 머물 수 없었다.
호텔 지배인은 우리를 경주 최 부자 집으로 안내해주었다.
최 부자 측은 선뜻 응해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호텔로 돌아왔다.
한옥집에서 태어난 나였지만 아흔아홉 칸 한옥에서 자본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우리를 받아준 경주 최 부자 가문에 감사 드린다.
경주에서 3박4일을 지내던 중 잊지 못할 추억이 생겼다.
포항 큰형님 형수가 바닷가 토박이 분이었는데,
영화 스타 아랫동서가 경주에 온다고 하니 친구 세 분과 함께 영덕대게를 부대에 가득 담아왔다.
형수는 큰동서로서 무척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과장 없이, 한 마리가 어린 아이 머리만한 크기였다.
이런 상품 대게는 요즘 잡히는 족족, 선상에서 일본으로 수출돼 뭍에서는 구경할 수 없다.
보름달 달빛이 포근한 밤.
우리는 형수의 사랑이 가득 담긴 대게를 밤새도록 먹었다.
6명이 한 부대를 다 먹어 치웠는데도 배탈도 안 났다.
그 뒤로도 그렇게 푸짐하고 맛있는 대게를 먹은 적이 없다.
(53) 난장판 결혼식 (상)
1964년 11월 14일 워커힐 호텔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신성일·엄앵란 커플.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중앙포토]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4년 11월 14일 결혼식까진 25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
쇼흥행업자인 ‘AAA쇼(3A쇼라고도 부름)단’ 김영호 단장은 우리 커플이 전국 5대 도시 공연에 나와 인사하는 조건으로 200만원을 내놓았다.
나로선 팬 서비스가 되기도 하고, 목돈이 생겨 일거양득이었다.
그 해 구입한 이태원 181번지 2층 하얀집 가격이 480만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금액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AAA쇼단은 후에도 남진·나훈아 등 잘 나가는 가수들을 앞세운 전국 투어쇼로 인기를 누렸다.
결혼 장소가 문제였다.
64년 서울 시내에 마땅한 결혼 장소가 없었다.
차태진 극동흥업 사장과 머리를 맞댔다.
차 사장이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을 제안했으나 엄앵란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시민회관에서 할 경우 쇼처럼 보일 수 있다는 우려였다.
엄앵란은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희망했다.
나도 그 뜻을 존중했다.
출입이 제한적인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 때 떠오른 게 워커힐이다.
63년 4월 개장한 워커힐은 박정희 정권이 외국인 유치 및 국내 관광산업 진흥을 위해 만든 야심작이다.
JP가 건립을 추진했다.
워커힐 안에는 ‘퍼시픽홀’이란 나이트클럽, 슬롯머신, 수영장·볼링장 등이 있었다.
슬롯머신은 미8군 부대를 제외하고 국내 처음이었다.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오재경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 전신) 초대 총재였다.
그는 자유당 시절 공보처장으로 재직했으며, 박정희 정권이 5·16 이후 공보부로 승격시키면서 공보부 장관이 됐다.
그러나 군사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은 관계로 취임 몇 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워커힐 호텔은 국제관광공사 관할이었다.
나는 오 총재를 존경했다.
영어도 잘 하고, 눈웃음과 단정한 옷차림으로 호감을 갖게 했다.
3·1절, 광복절, 한글날 등 나라의 가장 큰 행사를 주재했던 그였다.
나와 엄앵란은 시민회관 행사 때마다 먼 발치에서 오 총재께 인사 드렸다.
오 총재는 워키힐호텔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오 총재께 주례를 부탁 드리기로 했다.
나와 엄앵란은 혜화동 자택을 찾아가 오 총재께 큰절을 올렸다.
그 분이 주례를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의 부인은 이대 음대학장을 지낸 피아니스트 신재덕 여사.
오 총재는 주례를 허락하면서도 조건을 달았다.
“두 사람이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주례를 봐줄 수 있네.”
나는 오 총재께 맹세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오 총재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오 총재는 워커힐호텔 퍼시픽홀을 결혼식장으로 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워커힐호텔에서 결혼하는 첫 커플이 됐다.
운명의 날.
넋이 나갈 상황이 벌어졌다.
결혼식 접수계는 공군 조종사인 형님의 동기 두 세 분이 맡고 있었다.
워커힐 퍼시픽홀 입구에 폭이 2m쯤 되는 수로가 있었다.
하객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접수계를 맡은 형님들과 의자가 수로에 빠졌다.
바깥은 통제 불능이 됐고, 나는 장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면서 신랑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홀은 꽉 찼는데, 양가 부모님을 빼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닌가!
(54) 난장판 결혼식 (하)
1964년 11월 14일 결혼식을 마친 신성일·엄앵란이 워커힐 2층 테라스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케이크를 다 집어가는 대혼잡을 이뤘다.
결혼식장은 통제불능 상태가 됐다. 하객 3500여 명이 워커힐 퍼시픽홀을 덮쳤다.
영화사 제작부원 몇몇이 3000명이 넘는 하객을 통제하기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우리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결혼식장을 장악했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당연했다.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져 나왔다.
정체불명의 하객과 맞선 거친 제작부 인력이 몽둥이로 누군가를 때렸는데, 맞은 사람이 마침 동아일보 기자였다.
그 기자는 하객을 몽둥이로 때리는 법이 어디 있냐며 거칠게 항의했다.
다행히 엄앵란의 친구 남편이어서 사후 우리가 정중히 사과하는 선에서 넘어갔다.
앙드레 김이 정성스럽게 지어준 웨딩드레스도 짓밟혔다.
여왕처럼 머리에 관을 쓴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는 환상적이었다.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앙드레 김은 레드 카펫 앞까지 신부가 쓰고 갈 수 있는 망토를 세트로 만들어주었다.
길게 늘어트린 엄앵란의 망토는 뒤에서 누군가에게 밟혔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망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엄앵란은 이성을 잃고 좌중을 향해 고함쳤다.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 너무 하는 것 아닌가요.”
충분히 화날 만 했다.
그러나 신부가 직접 고함치는 건 지나쳤다.
나는 말도 못한 채 참으라는 의미로 엄앵란의 발등을 꾹 밟았다.
그 때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엄앵란은 지금도 주부강좌에서 기회가 있으면 ‘그 때 발등 눌린 기운으로 지금도 눌려 산다’고 말하고 있다.
객석의 웅성거림은 혼을 빼놓는 수준에 이르렀다.
레드 카펫 양쪽으로 나란히 세워놓은 국화꽃은 죄다 넘어졌다.
호텔 직원들이 꽃을 정리하고 난 후, 나는 누군가 입장하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 주례를 보는 오재경 국제관광공사 총재 앞에 섰다.
오 총재는 당황스런 얼굴을 했다.
“내가 안 불렀어. 장내가 정리되면 그때 나오게.”
주례 앞에서 퇴장했다가 재입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게 침착한 오 총재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몰라 했다.
최무룡·김지미 지인들은 아예 입장을 못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접수계가 없었다.
그들은 근처의 워커힐 슬롯머신으로 가서 축의금을 탕진했다.
거금 200만원을 들인 결혼식에 접수된 축의금은 단돈 2만 2500원.
전국의 소매치기는 다 몰려든 것 같았다.
친척을 운운하며 축의금을 가로챈 ‘네다바이(일본어로 사기라는 뜻)’도 부지기수였다.
오 총재는 2층 테라스로 올라가 입장 못한 하객들을 위해 인사하라고 했다.
2층에 올라갔더니 워커힐 측에서 120㎝ 높이의 대형 케이크를 마련해 놓았다.
꼭대기에 우리 커플의 모습을 조각해놓은 멋진 케이크였다.
둘이서 케이크를 커팅하는 순간, 사방에서 손이 뻗어 나오더니 케이크를 낚아챘다.
케이크는 순식간에 공중 분해됐다.
결혼식 후엔 웨딩카가 인파에 밀려 사라졌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다.
웨딩카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제작부장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길을 냈다.
우리는 제작부장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워커힐 빌라에 피신해 한동안 갇혀 있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결혼식이었다.
(55) 외설시비
신성일·박수정 주연의 ‘춘몽’(1965). 일본영화 ‘백일몽’이 원작이다. 유현목 감독은 실험적인 영상미를 추구했지만 결국 외설시비에 휘말리는 곤욕을 치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결혼식 직후 나와 연관된 영화가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외설시비였다.
65년 박수정이란 신인 여배우와 함께 유현목 감독의 ‘춘몽(春夢)’을 촬영했다.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검찰에 고소됐고, ‘오발탄’ ‘김약국의 딸들’로 유명한 유 감독은 실형을 받기까지 했다.
‘춘몽’은 ‘백일몽’라는 일본 작품을 각색했다.
일본에서 ‘백일몽’을 본 세기상사(대한극장) 국쾌남 사장이 유 감독을 설득해 제작이 이뤄졌다.
유 감독은 원작이 선정적이라며 고사했으나 표현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연출을 맡았다.
검찰은 전라 장면을 문제 삼았다.
한 청년이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맞고 치료를 받던 중,
옆자리의 여자환자를 보고 환각에 빠지게 되는 도입부와 그가 마취에서 깨어나 병원을 나서는 엔딩 장면만 현실적인 설정이다.
나머지는 꿈의 세계를 그렸다.
전라 장면은 꿈속의 여인이 천국의 계단을 올라가는 대목이다.
천국의 계단을 걷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입고 있으면 멋대가리가 없다.
‘춘몽’은 스토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표현으로 승부를 거는 작품이다.
유 감독은 영상미를 위해 나체 여인을 고집했다.
검열에 대한 압박감이 엄청났다.
제작진은 여배우에게 나일론 타이즈를 입혀 검열을 피해보려고 했다.
국내에 나일론 타이즈가 없던 관계로, 홍콩에 수소문해 물건을 구했다.
카메라는 박수정의 뒷모습만 담았다.
흑백화면이었기에 나일론 타이즈를 입으면 나체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간이 작아진 유 감독은 검열이 걱정돼 편집과정에서 이 부분을 잘라냈다.
그런 노력도 소용없었다.
검사가 해당 장면 사진을 어디선가 구해와 자료로 내밀었다.
유 감독은 징역에 1년 반 자격정지를 당했다.
졸지에 전과자가 됐다.
이후 상고해 집행유예를 받았으나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다.
지금 보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시 법정에선 강변이 통했다.
판·검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검열이란 돋보기를 들고 보는 정도였다.
나일론 타이즈를 입는 영화적 트릭 따위는 인정해주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부흥을 이룬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대중예술인 입장에선 아쉬움이 크다.
설렁탕에 기름기·고기 다 걷어내고 무얼 먹으라는 것인가.
70년대 영화는 엑기스가 다 빠져 버린 채 TV에 관객을 뺏겨버렸다.
배우들도 검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80년작인 ‘밤의 찬가’(김호선 감독)에서 원미경은 유두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이고 촬영했다.
유두가 상대 배우에게 닿는 것도 싫다는 뜻이 반영됐다.
연기자들도 보수적으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공 들어 다소 변화가 왔다.
전두환 정권은 통행금지를 없애면서 성을 개방했다.
81년 종로에 심야극장인 서울극장이 문을 열었고, 안소영 주연의 에로 영화 ‘애마부인’(정인엽 감독)이 상영됐다.
그 유명한 3S(Screen·Sports·Sex)의 일환이다.
밤늦게 퇴근한 노동자들이 값싸고, 오래 즐길 수 있는 심야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반면 현실 비판적인 영화는 눈곱만큼도 허용되지 않았다.
슬픈 시절이었다.
(56) 별거
2007년 10월 제12회부산국제영화제(PIFF) 개막식에서 배우 신성일·엄앵란씨 가족이 포즈를 취하고있다. 왼쪽 끝은 작은딸 강수화씨. 엄씨가 설립한 싱싱김치 대표로 있다. [중앙포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결혼 생활 아닌가 싶다. 하물며 사생활이 공개된 우리 부부는 어떠했으랴.
1964년 11월 14일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영화 출연으로 더 바빠졌고, 엄앵란도 촬영 중인 몇 작품을 마무리해야 했다.
사실 양가가 결혼을 썩 반기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악극계 집안이라는 이유로 엄앵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모 노재신 여사는 1939년 이명우 감독의 ‘홍길동전’으로 데뷔해 61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끝으로 은막을 떠난 선배 연기자였다.
또 아내의 스케줄을 꽉 쥐고 관리했다.
아내의 삼촌 엄토미(본명 엄재욱)는 색소폰 및 클라리넷으로 명성을 날리는 연주자였다.
어머니의 바램은 공미도리같은 명문가 며느리를 들이는 것이었으리라.
아내가 한 살 연상이라는 점도 어머니를 불편하게 했다.
처가 쪽도 뭔가 손해 본 느낌이었다.
엄앵란은 집안의 기둥이었다.
부모와 여동생, 그리고 친척들이 하늘같이 떠받들고 살았다.
그 쪽에선 아내가 영화배우 생활을 더 하길 바란 것 같다.
하지만 아내는 당시 29살.
과년한 나이였다.
아내는 몸만 왔다.
내가 결혼 전 “몸만 오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할 줄이야.
나는 아내가 배우를 접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살이 찌는 체질이어서 더는 연기 생활이 힘들어 보였다.
돈은 내가 버니 결혼 생활만 잘 해주면 됐다.
사실 엄앵란만한 아내도 없었다.
새벽까지 촬영하고 귀가 못하는 날이 많은 배우라는 직업을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들다.
엄앵란은 영화계를 이해하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면에서 최고였다.
새댁 엄앵란은 결혼 후 애매한 처지에 놓였다.
젊은 시절부터 살림을 할 겨를이 없었고, 시어머니가 부리는 사람이 5명 정도 됐다.
빨래·청소 등은 이들의 몫이니, 아내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시어머니 입장에선 뭔가 탐탁하지 않은 며느리였다.
시댁이 불편한 아내는 아침에 내가 나가면 촬영을 핑계 대고 약수동 친정으로 갔다.
시어머니 눈에 계속 날 수밖에.
고부 갈등이 깊어졌다.
65년 7월 초,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여기가 하숙집이냐.”
말다툼을 했다.
손찌검으로 이어졌고, 아내는 심하게 저항했다.
그 바람에 또 다시 손찌검이 됐다.
밥을 먹던 나는 딱 한마디로 내 기분을 표현했다.
“나가.”
아내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한 달 전 태어난 큰 딸을 업고 처가로 떠나버렸다.
자연스럽게 별거가 됐다.
6개월 가까이 됐던 것 같다.
영화계에선 이혼 직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부산일보가 주최하는 ‘부일상’에서 내가 주연상을 타게 됐다는 기별이 왔다.
부일상 조직위원회는 ‘모일 모시, 부산 제일극장에서 시상식이 있다. 반드시 엄앵란을 동반해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우리 부부가 정말로 이혼했는지 떠 보려는 모양이었다.
엄앵란을 동반하지 못한다면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는 셈이다.
부산일보가 이혼 기사를 터트려버릴지도 몰랐다.
처가에 간 아내와는 아직 화해도 못했는데….
정말 난처한 상황이었다.
(57) 장모와의 신경전
1985년 프랑스대사관에서 열린 파티에서 신성일·엄앵란 부부가 영화배우 문희(오른쪽)씨 등과 얘기하고 있다. 왼쪽에 코미디언 고(故) 이주일씨가 보인다. [중앙포토]
정면돌파. 내 특유의 문제 해결 방식이다.
결혼 직후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아내 엄앵란은 집을 떠났고, 매스컴은 우리의 별거를 보도할 태세였다.
‘세기의 결혼식’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우리의 결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부산일보 영화제(부일상) 시상식에 엄앵란을 데려가지 못하면 파경 기사가 터질 판이다.
약 한 달 전인 1965년 6월 9일, 큰딸이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고영남 감독의 ‘이 세상 끝까지’ 촬영 중이었다.
김지미는 원효로 신필름 세트장에서 출산 연기를 했다.
극심한 산고로 몸부림 치는 김지미를 남편인 내가 지켜보는 장면.
그때 엄앵란이 친정집 인근 약수병원에서 아기를 낳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나는 김지미의 귀에 “딸을 낳았으니 장차 무엇을 시킬까”라는 대사를 속삭인 뒤 공중전화 쪽으로 갔다.
전화를 걸어보니, 엄앵란 역시 딸을 낳았다.
현실과 영화가 그렇게 일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첫 아이에게 ‘경아(炅娥)’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는 여자 이름에 일본식으로 ‘자(子)’자를 붙이던 때였다.
딸 이름이 보도된 후, 동료 배우 이낙훈과 가수 패티김이 딸 이름을 ‘정아’라고 지었다.
훗날 소설가 최인호는 신문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 여주인공을 경아라고 지었다.
내가 출연한 ‘별들의 고향’까지 성공하면서 ‘경아’는 술집 아가씨의 대표적인 이름이 됐다.
부일상 수상차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 진땀 나는 일을 겪었다.
엄앵란이 딸 아이를 업고 우리의 주례를 서준 오재경 국제관광공사 총재를 찾아가 별거 얘기를 전했다.
나는 오 총재의 혜화동 자택으로 불려가 따끔하게 야단 맞았다.
“그래, 앵란이 하고 헤어지고 나서 배우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오 총재의 훈계는 내게 엄청난 압박이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오 총재의 질책을 받아들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엄앵란을 집으로 데려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오 총재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나는 약수동 처가로 들어갔다.
장모는 마루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나와 엄앵란 사이를 가로막았다.
못 만나게 하려는 심중이 분명했다.
사위의 기를 확실히 꺾어놓겠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장모와 대치하고 있는 중에 딸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의 그림자가 안방 한지 문짝에 실루엣으로 비췄다.
영화적 효과를 잘 아는 아내는 자기가 안방에 있음을 은근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장모와는 더 이상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엄앵란이 듣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경아 엄마, 내일 부일상 타러 가는데 아침 8시 김포 비행장에서 떠나요!”
엄앵란은 이렇게만 해도 모든 걸 알아들을 여인이었다.
나는 장모를 등 뒤로 하고 뛰쳐나왔다.
다음 날 아침 김포비행장에 가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러면서도 시상식에 혼자 설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58) 엄앵란의 선택
김진규·엄앵란 주연의 영화 ‘아빠 안녕’(1968). 신성일·엄앵란 부부와 김진규는 1965년 부산에서 열린 부일상 영화제 시상식서 몰려드는 관객들을 피하느라 한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엄앵란은 심지가 곧은 여자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풍파를 어떻게 견뎌 냈겠는가.
엄앵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아침 일찍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터미널 입구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엄앵란이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그녀는 곤경에 빠진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우리는 부산 제일극장에서 열린 부산일보 영화제(부일상) 시상식에 정답게 손을 잡고 나섰다.
그간 떠돌았던 온갖 추측과 소문을 단박에 잠재웠다.
제일극장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일반인이 스타배우를 직접 볼 기회가 많지 않던 때였다.
TV가 없던 시대였다.
우리는 주최 측이 마련해준 폭스바겐 비틀(일명 딱정벌레차)을 타고 극장 정문을 돌파했다.
제일극장은 라운지가 큰 편이어서 비틀 같은 조그만 차를 댈 수 있었다.
변변한 보디가드도 없었다.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는 배우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대선배 김진규가 그랬다.
열광하는 여인들에게 남자의 중요 부위를 잡히기도 했다.
가수 최희준의 경우 나와 함께 행사 무대에 선 날은
“신형, 나 먼저 가”라면서 재빨리 도망쳤다.
내 뒤에 있으면 빠져 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와 엄앵란은 별일 없이 사는 모습을 보이려고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매스컴의 속성을 너무 잘 알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는 우리가 잘 살길 바라기보다 헤어지길 바라는 심리가 감춰져 있다.
우리가 헤어지면 ‘그럴 줄 알았다’라며 박수치고, 고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게 자명했다.
오죽하면 나와 친분이 있는 제프리 존스 전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이
“한국인의 유일한 결점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걸 못 참는 것”이라고 했을까.
별거 기간 중 우리 관계를 파헤치려는 시도가 왜 없었겠는가.
엄앵란은 집에 꽉 틀어박힌 채 일절 함구했다.
현명한 처사였다.
나도 기자라면 전화도 안 받았다.
기자들이 남자 쪽, 여자 쪽을 따로 만나면서 서로 감정적인 기사가 나오고, 결국 타의에 의해 파경에 이르는 연예인을 많이 보았다.
언론의 속성이란 그렇다.
독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면 특종이 아니다.
기자 입장에선 특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무반응이 최선이다.
엄앵란과 떨어져 있는 동안 조그만 사건이 있었다.
나는 엄앵란 대신 내 여동생을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보스턴팝스오케스트라 지휘자 아서 피들러의 공연에 데리고 갔다.
내가 묘령의 여대생을 데려갔다는 식의 이야기를 매스컴의 누군가가 처가 쪽에 전했다.
엄앵란은 시누이를 데리고 갔으리라고 짐작하고 태연하게 대응했다.
그에 발끈해 양쪽이 하나씩 감정을 보태면 평행선이 그어질 뿐이다.
김포비행장에 도착한 즉시, 엄앵란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 두 사람은 감정이 풀렸지만, 아내와 어머니는 아니었다.
'아내를 다시 집에 데려다 놓은들, 어떤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아내는 또 다시 개밥에 도토리 신세일 뿐.
엄앵란을 안방 장롱 열쇠를 쥐는 명실상부한 안주인으로 만들어주어야 했다.
그 누구에게도 언질을 주지 않았다.
내가 꺼낸 카드는 나와 어머니, 엄앵란의 삼자대면이었다.
(59) 어머니의 따귀
1976년 1월 20일 서울 한남동 한강볼링장에서 열린 신성일씨의 모친 김연주(맨 왼쪽) 여사의 환갑 축하 자리. 가운데 소설가 최인호씨가 보인다.
남자가 중심을 잡아야 가정이 순탄하다. 남녀가 평등한 지금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왔다.
어머니와 아내 엄앵란, 나 셋이 이태원집 2층에 모였다.아내에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야 가정의 평화를 이룰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나가서 사셔야겠습니다.”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했다.
일찍이 과부로 살아오면서 막내인 내게 특별한 애정을 쏟으신 분이셨다.
그런 분에게 이런 기막힌 요구를 하다니.
하지만 당시로선 그 길밖에 없는 것 같았다.
“경아 엄마는 제가 데리고 살 여자이지, 어머니가 데리고 살 여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며느리 앞에서 내 따귀를 때렸다.
평생 처음 맞는 따귀였다.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분노에 찬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효자식!”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손이 날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께선 손을 잡히자마자 쓰러지셨다.
그리고 소파에 누우셨다.
나는 당황한 아내에게 말했다.
“경아 엄마, 냉수 좀 가져와요.”
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나는 속으로 ‘절대 기절할 분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처럼 의지가 굳은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손을 덜덜 떨며 냉수를 갖다 바쳤다.
어머니께서 눈을 뜨신 후 냉수를 입에 대셨다.
“생각해보자.”
어머니께선 이 한마디를 던지고 1층으로 내려가셨다.
1층은 어머니, 2층은 우리 내외의 공간이었다.
사흘 정도 흐른 날.
아내가 다가왔다.
“여보, 어머니께서 나가시겠다고 하세요. 집을 사 달라고 하시네요. 이미 집을 봐 놓으셨다는 거예요.”
일단 반가웠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
아들 내외와 대립하는 동안 정릉 국민대 부근의 집을 보아놓을 만큼 어머니께선 속이 깊으셨다.
집 앞으로 개천이 흐르는 예쁜 주택이었다.지휘자 금난새의 부모님도 그 동네에 살았다.
금난새 어머니는 그 동네에서 유치원을 운영했다.내 어머니는 그 곳에서 금난새의 부모님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어머니로부터 장롱 열쇠를 물려받은 엄앵란은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사람 네 명을 집에 들였다.
일단 고부갈등은 줄어들었다.
나에 대한 아내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아내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차례·제사·명절·어머니 생신 등 집안 대소사를 알뜰하게 챙겼다.
나에게 실망했던 어머니를 흡족하게 해드렸다.
대체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 마마보이가 되기 쉽다.
어머니에게 뺨을 맞은 순간, “알겠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었으면 나 역시 마마보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엄앵란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셈이다.
부부끼리 존경하고,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했다.
그때 선택에 대해 지금도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생각이 짧아 보였던 아들의 입장을 받아주신 어머니에게 감사할 뿐이다.
어머니와 분가한 뒤 200여 만원을 들여 이태원집을 새롭게 꾸몄다.
2층집에 한 층을 더 올리고, 3층을 응접실·스탠드바·서재 겸 음악감상실로 사용했다.
(60) 한여름의 추억
1970년대 청와대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이낙선 전 상공부 장관. 70년대 한국 경제발전을 이끈 주역 중의 한 명이다.
여름철이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끈 이낙선 상공부 장관이다.
70년대 초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어느 날.
나와 아내 엄앵란은 이 장관 부인과 함께 한남동 한강볼링장에 갔다.
멋쟁이들 사이에 볼링이 유행하던 때였다.
이 장관 부인은 엄앵란과 숙명여대 동기였다.
우리는 이 장관과 공적·사적으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장관은 국세청장으로 재직하던 65년 ‘납세의 날’을 만들어 각 분야 우수 납세자에게 표창을 했다.
나는 매년 영화·예술계 최고 납세자였다.
개인기업체 최고 납세자는 강석진 부산 동명목재 사장이었다.
동명목재는 합판을 만들어 큰 돈을 벌었다.
마침 그날 이 장관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신지 궁금했다.
이 장관 부인은 “집에 일이 있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장관 자택은 삼청동 총리공관 근처였다.이 장관 부인이 우리 부부를 삼청동 한옥으로 안내했다.
집에 들어섰다.
이 장관이 웃통을 벗고 삼베바지에 맨발로 온돌방에서 ‘콩댐’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팔로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분이 이런 소탈한 모습을 하고 있다니.
콩댐은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작업이 아니다.
불린 콩을 갈아 삼베 주머니에 넣고 온돌방 바닥에 골고루 문지른다.
밑에서 군불을 때 가며 여러 번 반복해야 콩기름이 장판지에 스며들며 광택을 낸다.
한옥 방을 니스로 칠하면 곰팡이가 나고, 썩기 쉽다.
하지만 콩댐을 해놓으면 오래 가고 색깔이 아름답다.
하루·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 장관은 시골 출신이었기에 콩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장관이 누구인가.
박 대통령이 신임하는 측근 중 측근이었다.
박 대통령은 점심도, 저녁도 청와대에서 측근들과 먹었다.
김성진 공보부 장관, 박준홍 총리실 기획관리실장 등이 멤버였다.
그러다 보니 이 장관은 평소 청와대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외출할 땐 “마누라가 나오라고 합니다”라며 핑계를 댔다.
박 대통령은 “젊은 마누라 거느리기 힘들구먼”이라며 내 보내 주었다.
이 장관은 만나기가 힘든 분이었다.
69년 상공부 장관 취임 이후 수입자유화와 외자도입을 주도했다.
기업들은 그 외자를 바탕으로 사업을 키웠다.
이 장관을 만나려는 기업인이 항상 줄을 서 있었다.
그런 이 장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콩댐을 하는 모습이라니!
우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장관은 민망한지, “이런 데 왜 왔어?”라며 투정 비슷하게 말했다.
이 장관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기에, 우리는 얼른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갔다.
엄앵란은 집에 가는 길에 이 장관의 중요 부위를 봤다고 털어놓았다.
이 장관의 바지가 헐렁해 그 사이로 보였던 것이다.
얼마나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인가.
내가 2008년 경북 영천에 한옥 ‘성일가(星一家)’를 짓고 콩댐을 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도 이 장관이었다.
- 계속 -
編輯 ... 張河多 多張印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