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맨발이다 - 인생은 맨발 마라톤…도전하라
(41) 트위스트 김
‘맨발의 청춘’(1964)에서 트위스트 김(왼쪽에서 셋째)이 신성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중앙포토]
영화 ‘맨발의 청춘’(1964)으로 덕을 본 사람 중 한 명이 트위스트 김(본명 김한섭·1936~2010)이다.
‘맨발의 청춘 배우’라는 후광으로 30년 동안 가수 겸 배우로 먹고 살았다.
부산에서 건달 노릇도 했던 트위스트 김은 당시 유행한 트위스트 춤바람을 타고 인기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전국 춤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진짜 춤꾼으로, 은막까지 진출한 행운아였다.
‘맨발의 청춘’ 이후 나와 트위스트 김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나는 청춘영화의 아이콘으로 영화에 전념했고, 트위스트 김은 종로 국일관 등 여러 밤 무대를 누볐다.
1981년 2월 실시된 11대 국회의원 선거 무렵이었다.
5공이 집권하고 영화산업은 붕괴했다.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제3당인 국민당을 찾아가 총선에 출마했을 때가 내 나이 44살.
집권당인 민정당에 들어가 훗날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뛰어든 정치라면 대권까지 도전하고 싶었다.
본명 ‘강신영’이로 당선되면 ‘신성일’이란 이름을 지우고 평생 정치인이 되려 했다.
하지만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빚더미에 앉았다.
선거가 끝나니 5000만원의 빚이 남았다.
괴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내가 빚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이 퍼졌다.
선거 패배 직후 찾아온 사람이 트위스트 김이었다.
그는 내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신형, 우리 국일관이 수리 중인데 여름에 신장 개업해요. 거기 나가서 돈을 버쇼.”
나는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박노식·독고성·장동휘·최무룡 등 선배들은 충무로가 어려워지자 밤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은막스타들이 밤 무대에서 망가졌던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트위스트 김은 하얀 것을 내밀었다.
백지수표였다.
“신형은 폼만 잡고 있으라고. 노래 부르는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백지수표를 보았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등에 진땀이 날 정도의 유혹이었다.
나를 괴롭히던 빚쟁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부’의 표현대로라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었다.
잠시 말미를 갖고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또 다시 트위스트 김이 전화를 했다.
그는 내가 느끼는 유혹의 강도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신형, 결정했어요?”
밤 무대 출연은 청춘스타 신성일의 몰락을 뜻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롱을 받을 게 뻔했다.
내 삶에 대한 경외심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제안을 받은 이틀 동안 밤잠을 설쳤다.
그 날 밤 아들 석현이가 꿈에 나타났다.
“아빠, 국일관에 나가지 말아요.”
석현이가 울면서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실감났으면 온몸이 땀에 젖었을까.
가슴 속에 ‘견디자’는 한마디를 새겼다.
다시 트위스트 김이 전화를 했을 때 내 결심을 확고하게 말했다.
그는 “이만한 대우가 없는데…”라며 매우 아쉬워했다.
나는 “우리 아들이 꿈에 나타나 밤 무대 나가지 말라고 하더라”며 그간 일을 사실대로 전했다.
이후에도 나는 밤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 나이에 이만큼 사는 것도 내 몸을 깨끗하게 지켜온 덕분이다.
(42) 최무룡
내가 거의 유일하게 선배로 여겼던 최무룡이 주연한 TBC 일일드라마 ‘비밀’(1972). 최무룡(맨 오른쪽)이 사미자(왼쪽에서 두 번째)와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계 선배는 최무룡(1928~99년)이다.
그도 1970년대 들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밤무대에 섰다.
트위스트 김이 내게 백지수표를 내민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화계의 자존심인 최무룡이 밤무대에 서다니….
내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최무룡은 착한 사람이었다.
나의 연기를 자상하게 지도해준 거의 유일한 선배였다.
극단 신협 출신인 그가 51년 피난지 대구에서 열연한 연극 햄릿 역은 두고두고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얼굴은 개성이 넘치고, 눈 연기에 관한 한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상대 배우의 리액션도 잘 받아줬다.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데 탁월했다.
‘젊은 그들’(1955), ‘꿈은 사라지고’ ‘장마루촌의 이발사’ ‘비극은 없다’ ‘청춘극장’(1959), ‘남과 북’(1965) 등이 내가 꼽는 최무룡의 대표작이다.
재능이 넘치고, 연기 기초가 그렇게 단단한 사람은 드물었다.
게다가 엄청난 달변이었다.
나는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 할까’라며 항상 감탄했다.
너무 말을 잘 하다 보니 언행일치가 잘 안 되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잘 베풀면서도 후배들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
71년 명동 메트로호텔 부근 술집 ‘라 데 팡스’에서 최무룡이 밤무대에 선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뜯어말리고 싶었다.
나는 어느 날 라 데 팡스 객석 맨 앞 줄에 진을 치고 앉았다.
타고난 미성의 소유자인 최무룡의 노래는 역시나 달콤했다.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역시나 취객들이 “최무룡, 이리 와서 술 한 잔 받아라”라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마치고 들어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앙코르, 앙코르!”
눈물이 살짝 맺혔다.
그 누구도 모르게 역설적으로 항변을 한 셈이었다.
밤무대는 1년 단위로 출연 계약을 했다.
이론적으로 365일 출연하면 계약에서 풀려나게 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개인 사정으로 하루 펑크를 내면 거기에 하루를 더 붙여 이틀을 서야 했다.
일년 계약하고서 기간 내에 끝나는 사람은 없었다.
업자들은 1년 계약하고 2~3년 간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빼기 힘든 곳이 밤무대였다.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최무룡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더니 황급히 사라졌다.
보통 손님이 찾으면 밤무대 가수는 인사를 하는 법이지만,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술집부장을 찾아 “최무룡씨 왜 안 나오나”라고 물었다.
부장은 “가셨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최무룡은 76년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어려운 생활을 했다.
지난해 늦가을, 꿈에 최무룡이 두 차례 나타났다.
그는 빛나는 후광을 등에 지고,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옷은 화려하게 빛났고, 얼굴이 선명하게 맑게 보였다. 내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술 사라.”
부산의 유명한 도인의 조언을 받아 부산 범어사에서 최무룡 천도재를 지냈다.
사재를 털어 바라춤·살풀이춤에서부터 연춤까지 판을 크게 벌였다.
최무룡 선배, 하늘에서 편안하시길….
(43) 코끼리의 비극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1962)에서 신성일이 연상의 이민자와 멜로 연기를 펼치고 있다. [중앙포토]
백 번 잘해도 한 번 잘못으로 망할 수 있다.
1960년대 최고 흥행 영화 ‘맨발의 청춘’을 제작한 극동흥업이 그랬다.
극동흥업은 나와 엄앵란 콤비, 김기덕 감독을 앞세워 날로 사세를 키워갔다.
60년대 초·중반 내가 주연한 ‘아낌없이 주련다’ ‘가정교사’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불량 소녀 장미’ ‘말띠 신부’ ‘흑발의 청춘’ ‘불타는 청춘’ 등을 쏟아냈다.
극동흥업과 관계가 긴밀했던 아카데미극장은 ‘맨발의 청춘’ 하나로 빚 1억원을 다 갚았다.
67년께 극동흥업은 서울 중심가의 빌딩 하나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자금을 축적했다.
어떤 영화든 잘 만들어내는 전천후 감독인 김기덕이 소속돼 있었다.
차태진 사장과 함께 극동흥업을 창업하다시피 한 김 감독은 찍기만 하면 흥행이 되는 ‘달러 박스’였다.
든든한 우군을 가진 차 사장은 중부경찰서 맞은편의 잡지사(희망사) 빌딩을 사서 사옥을 옮기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김 감독에 따르면 극동흥업은 홍콩의 대규모 서커스단를 유치해 전국 투어 방향이 전면 수정됐다.
이 서커스단은 코끼리까지 보유하는 등 당시로서는 세계 3대 서커스에 들어갔다.
자금을 더 키우려는 욕심에 꼭 맞아떨어지는 이벤트였다.
피에로가 대포를 발사하면 그 속에 있던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등 60년대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대였다.
전국 투어의 출발점은 부산이었다.
대구와 각 도시를 거쳐 화려하게 서울로 입성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공연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자금 문제로 외환관리법과 마찰을 빚으며 차질이 발생했다.
계약을 마친 다음 홍콩 측과 이면으로 진행해야 하는 사항도 있었다.
극동흥업은 각 지역에서 매점 등을 운영할 업자를 선정하고, 이들로부터 선금을 받았다.
복잡한 사정으로 공연 일정이 지연됐고, 계약 불이행과 관련한 피해 분쟁이 일어났다.
서커스단 규모도 축소됐다.
결정타는 코끼리 사망 사건이었다.
부산항에서 하역하던 홍콩 서커스단의 코끼리가 바다에 빠져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서커스는 서울까지 올라가지도 못했다.
지방 공연에서 가는 곳곳마다 죽을 쓴 탓에 극동흥업은 자본금을 소진했다.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한국에 온 홍콩 서커스단 단장은 하루 아침에 날거지가 됐다.
본국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인천의 허름한 여관 방에서 생활하던 그는 PX에서 물건을 훔치다 잡혀 구속됐다.
단원과 동물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이 공연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망했다.
차 사장은 부도를 내고 해외로 도피했다.
극동흥업이 손해 본 액수를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족히 수백 억은 됐을 것이다.
급한 불은 김 감독이 껐다.
그 자금은 영화계에서 나왔다.
차 사장이 영화계에서 인심을 잃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는 단면이다.
극동흥업은 다음 해 재기를 노렸다.
나를 포함해 극동흥업과 인연이 깊었던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김 감독이 연출한 작품에 출연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홍콩 서커스 후유증에 시달리던 극동흥업은 이후로도 명맥만 유지하다가 72년 정부에서 부실 영화사를 정리하면서 문을 닫게 됐다.
(44) 청평호 키스 사건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배신’(1964). 경기도 가평 청평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키스를 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나는 연기와 사랑을 혼돈하지 않았다.
농도 짙은 멜로 연기를 해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엄앵란이었다.
엄앵란은 1963년 ‘새엄마’ 촬영 당시 내 목에 찍힌 키스 마크를 본 후 알뜰살뜰 나를 돌보았다.
촬영장에 나올 때 꼭 내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왔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연인의 감정보다 선배의 배려에 가까웠다.
‘맨발의 청춘’이 상영된 64년 나는 출연작 33편 중 23편을 엄앵란과 함께했다.
가족보다 엄앵란과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우리를 이상한 각도에서 처음 다룬 기사가 산업경제신문 연예가십란에 게재됐다.
‘신성일·엄앵란 열애 중’이라는 추측성 기사였다.
내 매니저가 ‘새엄마’ 촬영장에 신문을 들고 와 모두들 웃었다.
읽어보니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겸연쩍게 웃어넘겼다.
63년 늦가을 경기도 가평군 청평호에서 ‘배신’ 촬영이 있었다.
장동휘가 조직의 보스, 엄앵란이 장동휘의 애첩, 내가 애첩의 수행원 역이었다.
애첩과 수행원이 보스 몰래 아슬아슬한 사랑을 하는 작품이었다.
라스트 신 촬영 때였다.
정진우 감독은 호수 한가운데 멀리 보트를 띄워놓고 나와 엄앵란이 껴안는 장면을 롱샷으로 잡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줌 렌즈가 없었다.
보트장은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있었다.
보트장 주인이 날 보더니 반가워 했다.
청평으로 촬영을 자주 나간 탓이었다.
보트에 오르면서 속으로 ‘기회는 왔다’고 생각했다.
보트를 조종하는 친구가 눈치도 없이 따라 올라탔다.
원래 보트 키는 조종 경험이 없는 사람은 만질 수 없다.
그래도 방해꾼이 없어야 기회를 잡을 게 아닌가.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너, 내려.”
그 친구는 순순히 내게 키를 넘겼다.
나는 직접 보트를 몰고 메가폰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갔다.
정 감독은 호수 한 가운데 떠있는 우리에게 수신호로 ‘Go’ 사인을 내면서 서로 밀착하라고 지시했다.
키스를 하라는 주문은 없었다.
내 눈 앞엔 엄앵란의 빨간 입술만 보였다.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랜만에 엄앵란을 껴안으니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앵란도 당황한 듯했다.
“미스 엄, 가만 있어봐.”
이 키스는 연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키스를 방해할만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키스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정 감독은 우리 커플이 탄생하는 것을 가장 먼저 지켜본 목격자라 할 수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구로자와 아키라(<9ED2>澤明)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에서,
산도적 타조마루는 아무 잘못 없는 사무라이를 죽인 이유를 “살살 부는 바람 때문에”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역사도 청평호의 물결과 바람이 살랑거렸기 때문에 시작된 것일까.
이후 서로를 바라보는 나와 엄앵란의 눈빛이 달라졌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손을 잡고 가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미스 엄이 나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45) 내 남자, 내 여자
신성일(오른쪽)·엄앵란이 영화 ‘잃어버린 태양’(1964)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진 ‘대륙의 밀사’ 직후 찍은 작품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큐피드는 경기도 가평 청평호 위에서 나와 엄앵란에게 화살을 계속 쏘아댔다.
키스 사건 이후 또 한 번의 화살이 우리를 묶어버렸다.
1964년 늦봄 다시 청평호에서 ‘대륙의 밀사’를 촬영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독립운동 밀사들을 다룬 시대극이다.
나와 엄앵란이 일본군에 쫓기는 마지막 장면을 찍게 됐다.
내가 보트에 여인을 태우다가 뒤에서 총을 맞고 물속으로 떨어지는 대목이었다.
이어 엄앵란이 보트에 로프를 걸어 물에 빠진 나를 끌고 가는 설정이었다.
물 위로 총알 튀기는 장면이 실감나야 했다.
폭파 감독은 수류탄 내관에 플러스·마이너스 선을 연결해 물 위에 띄워놓고 터뜨렸다.
요즘은 PVC 비닐에다가 마그네슘도 넣고, 횟가루도 넣고, 선을 넣어가지고 밀폐해서 아주 작은 팩으로 만든다.
사이즈는 엄지손가락만하지만 폭발하면 불길도 나고, 마그네슘이 타면서 석회분 가루도 튀니 안전하면서도 효과가 제대로 난다.
수류탄 구리 뇌관이 ‘파파파’ 소리와 함께 터졌다.
그게 불행히도 엄앵란의 얼굴을 향했다.
물에 빠진 상태에서 올려다 보니, 엄앵란의 얼굴이 핏자국으로 변해있었다.
얼굴로 먹고 사는 여배우에겐 치명타였다.
나는 급히 보트에 올라타 핸들을 뭍으로 돌렸다.
인근 병원에서 간단하게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쏜살같이 을지로5가 메디컬센터로 갔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외국계 병원으로, 당시 서울대병원 다음으로 유명했다.
병원에선 ‘신성일·엄앵란이 왔다’고 난리가 났다.
‘맨발의 청춘’으로 우리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태원 181번지 2층 하얀집을 480만원에 샀을 정도로 돈도 벌었다.
결혼 후 얘기지만 전 가족을 데리고 남이섬 별장에 갔을 때도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는 전용보트로 휴가물품을 실어 옮겼다.
인근 주민들이 온종일 별장을 둘러쌌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동물원에 갇힌 동물 신세가 됐다.
나는 화가 나 그날로 별장을 처분해 버렸다.
메디컬센터 의사들이 와서 엄앵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구리 뇌관이 면도칼 조각처럼 얼굴을 쫙쫙 긁고 지나갔다.
눈을 안 다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 때는 성형외과가 없었다.
의사는 치료를 마치고 난 후 ‘더 이상 손댈 게 없습니다. 다시 약 바릅시다’라고 정리했다.
그런데 왠지 내 뒤가 따끔따끔 했다.
등과 엉덩이를 살피던 의사가 물었다.
“미스터 신은 괜찮아요?”
“저도 뒤가 이상한데요. 한 번 봐주세요.”
알고 보니 내가 엄앵란보다 더 큰 부상을 당했다.
엉덩이·허벅지 등 바지 뒷부분이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엄앵란에 신경을 온통 쏟은 바람에 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엄앵란은 이 사건으로 나를 평생의 배우자로 확신했다고 한다.
우리를 태운 차는 청평에서 서울까지를 전속력으로 달려 1시간 반 만에 주파했다.
그 시간 동안 엄앵란은 내 품에 안겨있었다.
내가 부상 당한 것도 모르고 엄앵란을 걱정해주었으니. 이 사건으로 신성일은 한 살 연상인 엄앵란의 마음 속에 ‘여자를 보호하는 남자’로 각인됐다.
나 역시 내가 엄앵란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우리는 눈빛으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은 내 남자, 내 여자….
(46) 지프차 난투극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잃어버린 태양’(1964)의 한 장면. 고영남 감독의 데뷔작이다. 담배를 피고 있는 여인으로 신성일과 마주하고 있는 배우는 도금봉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64년 7월 무렵 ‘잃어버린 태양’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맨발의 청춘’에서 조감독을 맡은 고영남의 감독 데뷔작이었다.
나와 엄앵란은 젊은 패기로 ‘맨발의 청춘’을 만들어낸 고 감독의 재능을 인정했다.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이 우리에게 신인 감독을 소개해달라 해서 추천했었다.
한남동 단국대 부근 세기촬영소 한 구석에서 온종일 나를 뚫어지게 보는 이가 있었다.
연합영화사 제작부장 김태수였다.
그날 저녁 나는 또 다른 영화 ‘목마른 나무들’을 찍었어야 했는데, 김 부장이 나를 빼앗아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목마른 나무들’은 정연희 작가 원작에 ‘배신’의 정진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었기에 나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 감독의 데뷔작이어서 ‘잃어버린 태양’도 많이 도와줘야 했다.
당시 각 영화사는 주먹을 쓸 줄 아는 사람을 제작부장으로 기용했다.
나와 엄앵란의 출연 여부가 영화 흥행과 직결됐던 때였다.
제작부장들은 나와 엄앵란이 모월 모일 몇 시에 무슨 영화를 찍고 있는지 줄줄 꿰고 있었다.
그걸 정확히 모르면 영화사에서 퇴출됐다.
곽정환 사장(左), 고영남 감독(右)
제작부장의 능력은 다른 것이 없었다.
우리의 스케줄을 따오는 사람이 최고였다.
그들은 몸싸움도 불사해야 했다.
연합영화사 김 부장도 주먹 출신이었다.
나는 권투 선수 출신 안천호를 매니저로 두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촬영 분량이 많은 탓에 고 감독은 일정대로 끝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 주변에선 살기등등한 김 부장이 버티고 있었다.
고 감독은 “빨리 다른 촬영장으로 가라”며 미안해했다.
내가 빠져 나가면 세트가 곧 부서질 게 뻔했다.
나는 고 감독을 위해 한 시간을 더 버텼다.
화가 난 김 부장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 못해 화풀이로 내 운전기사를 때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에게 맞섰다.
“이 새끼야, 애를 왜 패냐? 내가 월급 주는 아이를 패면 나와 붙자는 이야기 아니냐!”
내가 선방을 날렸다.
아수라장이 되자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렸다.
곽 사장은 대화로 해결하라면서 나와 김 부장을 지프차에 밀어 넣었다.
나도 상대가 누구든, 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우리는 차 안에서 치고 받았다.
육중한 지프가 들썩거렸다.
나는 왼쪽 눈이 부어 오르고, 김 부장은 이가 부러졌다.
‘목마른 나무들’ 촬영도 급했다.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서둘러 미아리 세트장으로 갔다.
도착했더니 그 유명한 충무로 주먹 오형제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며 턱 버티고 있었다.
김 부장이 당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분위기를 감지한 내 매니저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신성일 팰 거야? 떼거리로 싸우지 말고, 신성일과 일대일로 떠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만약 여럿이서 나를 공격한다면, 권투 선수 출신인 자신도 가담하겠다는 경고였다.
나는 얼굴 한 쪽이 완전히 부었다.
그때 연합영화사 사장이 달려와 우리를 말렸다.
말할 필요도 없이, 기분은 엉망이었다.
결국 그 날 촬영은 한 쪽 얼굴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끈질겼다.
(47) 장동휘의 개입
1970년대 자리를 함께한 신성일(오른쪽)과 장동휘. 장동휘(1920~2005)는 한국 액션영화의 대표적 스타였다. 두 사람은 1964년 서로 마음이 상하며 평생 불편한 관계가 됐다. [중앙포토]
1964년 7월 영화 ‘잃어버린 태양’ 난투극의 여파는 컸다.
연합영화사 제작부장 김태수와 지프차에서 주먹다짐을 한 직후 충무로 주먹 오형제가 ‘목마른 나무들’ 미아리 촬영장에 나타나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사 측의 중재로 일단 촬영은 했으나 내가 귀가했을 때, 그들은 “너, 배우 해먹나 봐라”라며 공갈 전화를 해댔다.
다음 날 아침 산업경제신문에 내 주먹에 맞아 이가 부러진 김 부장의 얼굴이 클로즈업돼 실렸다.
‘배우가 제작부장 폭행’ 제목이 달렸다.
하루 아침에 폭력 배우로 질타를 받는 신세가 됐다.
도처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주먹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권투선수 출신인 매니저 안천호가 일단 며칠이라도 서울을 떠나라고 권했다.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제주도로 갔다.
엄앵란과 매니저에게만 행방을 알려주었지만 막상 제주도에 도착하니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됐다.
우리 가족은 제주관광호텔에 투숙했다.
‘신성일이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호텔 맞은편 제주여고 학생들이 담벼락에 매달린 채 나를 큰소리로 불러댔다.
그 중에 여배우 오수미가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그녀로부터 들었다.
오수미는 당시 제주여고 2학년이었다.
제주여고 교감선생이 내 방을 찾아왔다.
나 때문에 아침수업을 못하고 있으니 호텔 옥상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인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5층 옥상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교감선생은 내 팬이라며 사인까지 받아갔다.
당시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가칭 5·16 횡단도로가 건설 중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61년 창설한 국토건설단이 그 도로공사에 투입됐다.
건달·부랑자 등이 강제 동원됐다.
서귀포도 구경했다. 승합차로 서해안 모슬포 자갈길을 6시간 반이나 달려갔다.
서귀포는 듣던 대로 이국적 풍광이었다.
나와 어머니의 마음을 앗아갔다.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눈 앞이 깜깜했다.
차량 기사가 서귀포 경찰서장에게 부탁하면 횡단도로를 탈 수 있다고 귀띔했다.
내가 서귀포 경찰서에 들어서니 야단이 났다.
경찰서 직원들과 다같이 사진 한 장 찍으니 만사형통이었다.
경찰서장의 사인을 받아 공사 중인 도로를 타고 제주시까지 2시간 만에 넘어왔다.
다음 날 아침 선배 배우 장동휘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 ‘배신’을 같이 촬영해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인천의 유명한 주먹 출신으로 악극단 생활을 하다 영화계로 들어왔다.
발차기의 달인인 그는 다짜고짜 다그쳤다.
“나 장동휘야. 너 왜 사람을 함부로 패? 사과 안 해?”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주먹 편을 들다니.
충무로 주먹 오형제가 장동휘에게 비호를 요청했을 수 있다.
“장 선생님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사과는 내가 받아야 합니다.”
결국 서로 감정이 상한 채 전화를 끊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영원한 원수가 됐다.
세월이 흘러 78년, 배우협회 위원장 선거 당시 험악한 분위기로 치고 박기 직전까지 갔다.
제주도에서 3박4일 머무는 동안 매니저가 일을 정리했다.
김 부장을 위시한 충무로 주먹 오형제와는 화해하고 형제처럼 지내게 됐다.
(48) 스키야키 데이트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1964)의 한 장면. 신성일과 엄앵란은 바쁜 촬영 일정 중에도 충무로 일식집에서 스키야키를 먹으며 몰래 데이트를 즐겼다.
그 바쁜 일정에도 나와 엄앵란은 살짝살짝 데이트를 즐겼다.
1964년 늦봄 ‘대륙의 밀사’ 촬영을 마친 다음 우리는 서로 크게 의지하게 됐다.
‘떠날 때는 말없이’ ‘동백 아가씨’ 등에서 연이어 호흡을 맞추었다.
나는 ‘잃어버린 태양’ 때는 무려 10개 작품이나 동시에 찍었다.
엄앵란의 말을 빌리면 ‘드럼통 속에서 흔들리는 돌’ 같은 감각으로 살았다.
작업은 살인적이었다. 제작부장들은 우릴 한 번 놓치면 일주일 혹은 보름 후에나 만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따라다녔다.
양쪽 코트를 왔다 갔다 하는 배구공 같은 신세였다.
연애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촬영 중간, 가끔씩 비는 시간이 생겼다.
우리는 소공동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맨스 바’나 조선호텔의 ‘프린세스 룸’ 같은 바에 숨어들어 갔다.
칵테일을 한 잔씩 시켜놓고 서로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팬이라며 인사를 하거나 사인해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눈빛을 교환하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곳을 출입하는 멋쟁이 부인들은 웨이터를 시켜 칵테일을 잔으로 우리 테이블에 보냈다.
잠시 앉아있으면 테이블이 술잔으로 가득 찼다.
우리는 감사의 마음만 전하고 자리를 떴다.
나와 엄앵란이 나타나면 길거리가 난장판으로 변할 때였다.
엄앵란은 남들처럼, 눈 오는 날 남산공원에서 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도 만지고, 땅콩도 까먹으면서 산책을 하고 싶어했다.
작정하고 날을 잡았다. 우리는 상상한 그대로 땅콩과 오징어를 사서 걸었다.
밤이니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듯 싶었다.
웬걸! 껌 파는 아이들이 케이블카 앞에서 ‘신성일, 엄앵란이다’라고 외쳤다.
밤에 어디서 그 많은 사람이 튀어나오는 건지. 우리는 눈길에 미끄러지고 엎어지면서 도망갔다.
결국 남산파출소로 피신했다.
우리는 집에서 통화를 하다가 전화기를 베고 잠들었다.
충무로 대연각빌딩 옆에 ‘충무가’라는 일식집이 있었다.
우리 둘만의 추억이 깃든 장소다.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가 가면 다른 손님 눈에 띄지 않도록 2층 구석방으로 안내했고, 손수 스키야키를 만들어 주었다.
스키야키는 각종 야채를 다듬고, 숯불로 정성스럽게 끓여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최고의 음식은 스키야키라고 생각한다.
주물 프라이팬 가운데 오목한 부분에 진득한 국물이 만들어진다.
대파·무·당근·배추·쑥갓·양파 등 물기 많은 야채의 엑기스와 고기의 단백질이 섞인 것이다.
야채 국물과 육수를 빨아들인 두부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익힌 고기를 식혀 건져먹은 다음, 취향에 따라 국수·당면·우동 중 한 가지를 넣고 야채마저 먹은 후 밥까지 비벼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지금도 나는 충무가 스키야키를 종종 떠올리며 추억에 빠지곤 한다.
(49) 심장마비 1분 전
신성일 주연의 영화 ‘보고 싶은 얼굴.’(1964) 신성일은 이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부산 송정리 해수욕장에서 촬영한 ‘목마른 나무들’에서 수영을 하다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상대방 행동의 밑바닥에 깔린 마음을 읽어내는 눈썰미는 세상살이에 큰 도움을 준다.
주먹도 사람이긴 마찬가지다.
1964년 여름 ‘잃어버린 태양’과 ‘목마른 나무들’ 촬영 중 주먹들과 시비가 붙은 탓에 나는 잠시 제주도로 피신했다.
그 동안 매니저가 사태를 수습했다.
복귀 후 첫 촬영지는 부산 송정리 해수욕장.
엄앵란과 ‘목마른 나무들’의 해변 데이트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해변에 도착하니 갈증도 나고, 너무 더웠다.
나는 해변에 파라솔을 꽂자마자 그 아래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들었다.
어릴 적부터 영덕 바닷가에서 수영으로 단련된 몸이다.
100m쯤 헤엄쳐 갔을까.
갑자기 근육경련이 일어났다.
몸이 뻣뻣해졌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럴 땐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해야 한다.
그러나 물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익사하거나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일단 배와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물에 둥둥 떠있었다.
그때 나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부산 영도다리를 장악하고 있는 안태섭이었다.
그 일당은 매년 여름 해수욕장에 진을 치고 자릿세를 받았다.
송정리는 교통이 불편해 치외법권지대나 다름없었다.
그는 물에 둥둥 뜬 채 움직이지 못하는 날 보고는 사태를 파악했다.
“가봐라. 저 놈 사고 났다”며 부하 둘을 보냈다.
그들에게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근육경련이 발생한 곳은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따뜻한 물에서 수영하다가 갑자기 찬 물속으로 들어가니 사고가 날 수밖에.
준비 체조도 없이 뛰어든 게 화근이었다.
촬영이 끝난 뒤 안태섭이 “술 한 잔 하자”며 찾아왔다.
술 자리는 사양하고 대신 술값을 두둑하게 주었다.
그는 나와 안면을 튼 후 부산에서 사고가 나면 이태원 우리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훗날 주먹 생활을 청산하고 유명한 가요계 매니저가 됐다.
김정명이라는 주먹도 알게 됐다.
사고를 치고 내게 달려왔길래 제주도로 보냈다.
안태섭과 김정명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어느 날 안태섭이 “큰형한테 공갈쳤다”며 이태원 집으로 김정명을 끌고 왔다.
두 사람은 잔디밭 정원에서 한 판 붙겠다고 씩씩거렸다.
대결이 벌어졌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고수들의 대결에선 어느 한 쪽이 넉장거리로 나가 떨어지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엄앵란이 한마디 했다.
“거참, 잘 싸우네.”
대결 후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안태섭은 싸울 때 발을 잘 썼고, 김정명은 주먹에 능했다.
나는 의형제로 지내던 권투선수 서강일에게 김정명을 소개했다.
김정명을 권투선수로 키워볼 참이었다.
서강일은 야심 차게 김정명을 조련했다.
3개월 뒤 어느 날, 김정명이 나를 찾아왔다.
얼마나 하드 트레이닝을 받았으면 통통했던 몸이 홀쭉해졌을까.
그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큰형, 너무 힘들어. 난 맞아 죽어도 권투 못해.”
김정명은 권투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 이후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이들을 상대하면서 주먹을 이해하게 됐다.
촬영장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서성거리는 것은 나와 형·아우로 지내고 싶다는 그들만의 표현이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한마디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었다.
(50) 권투선수 서강일
1965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타이틀매치에 도전한 권투선수 서강일(왼쪽)이 당시 WBA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 엘로르데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다. [중앙포토]
1960년대 중반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됐다.
권투선수 서강일과 야구선수 유백만이다.
우리 셋은 대중잡지 ‘아리랑’이 선정한 분야별 최고 스타로 시상식에서 만났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분야가 영화·야구·권투·농구였다.
농구에선 박신자가 독보적이었다.
우리는 의형제로 지냈다.
내가 가장 손위였고, 유백만과 서강일 순이었다.
각자 바빠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자리가 생기면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셋 다 술을 못하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나는 이태원집을 얻은 후 집안 뒤뜰에 샌드백을 달았다.
서강일은 우리 집을 드나들며 내 매니저 안천호와 함께 권투를 지도했다.
홍수환과 함께 역대 최고 테크니션으로 평가 받는 서강일의 인기는 대단했다.
65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WBA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 엘로르데에게 도전했으나 잘 싸우고도 아쉽게 패했다.
한국 프로복싱 최초의 세계 타이틀매치 였다.
권투선수 서강일(左), 야구선수 유백만(右)
64년 어느 날, 서강일·유백만과 함께 이봉조 악단이 있던 남산 회현동 유엔센터 나이트클럽을 찾아갔다.
당시 회현동은 명사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임했던 여성 장관(상공부)인 임영신 중앙대 총장이 대표적이다.
나는 경기도 안성 임 총장의 개인농장에 초대받기도 했다.
유엔센터 나이트클럽은 우리나라 최초의 스트립쇼를 연 곳이며, 이봉조의 아지트였다.
외국 스트립걸들은 주요 부분을 가리고 출연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그날 구석 테이블에 체격 건장한 주먹 5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이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술을 먹으라 하고 심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서강일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서강일을 말렸다.
자칫 잘못 때리면 살인이 날 수도 있었다.
사고가 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아마 그들은 상대가 서강일이라는 걸 몰랐던 듯싶다.
서강일은 그들을 상대로 여유를 부렸다.
내가 서강일 대신 말했다.
“우리 밖에 나가서 한 판 붙을까?”
나이트클럽 주차장은 차 20대를 댈 정도의 크기였다.
5대만 주차돼 있어 싸울 공간은 충분했다.
사실 서강일의 싸움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다.
격투가 벌어지자마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권투선수인데도 번개같은 발길질을 구사했다.
서강일의 주먹과 발길이 지그재그로 번쩍번쩍 교차한 순간, 5명 모두 나가 떨어졌다.
나는 ‘이야, 권투선수가 어떻게 이렇게 싸움을 잘하나’라며 속으로 감탄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나와 인연이 있는 주먹인 안태섭은 발을, 김정명은 주먹을 기막히게 썼다.
안태섭의 발과 김정명의 주먹을 합치면 정확히 서강일이었다.
큰 키에 반듯한 몸. 소년 시절 고아원과 명동 구두닦이를 거치며 싸움에 이골이 난 그였다.
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MBC 청룡 코치를 거쳐 훗날 감독까지 한 유백만은 너무 얌전해서 싸울 줄도 몰랐다.
그는 나보다 더 놀랐던 것 같다.
서강일은 미국 LA로 이민간 후 소식이 뜸해졌다.
유백만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농원 생활을 하고 있다.
요즘도 유백만과 가끔씩 전화 연락을 한다.
누가 들어도 믿기 어려운 무용담을 함께 나눈 어제의 용사들이다.
- 계속 -
編輯 ... 張河多 多張印河